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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능엄주 2016. 3. 5. 23:31
 
 

한낮의 땡볕을 마다않고 독락당(獨樂堂)을 향해 걸어갔다.  길가에 물이 통통 오른 돌나물이 소복하게 나 있다. 이제 막 패기 시작하는 벼논에서는 비릿한 쌀 내음이 시장기를 부추긴다. 쪼그려 앉아 돌나물 한 움큼 뜯고 싶다. 생으로 입에 넣고 씹으면 상긋한 맛이 식감을 자극할 것 같다.

독락당은 대문 기둥에 300-3 李海轍이란 문패가 붙어 있다. 회재 선생의 별장이면서 서재였다는 독락당 안채는 출입금지여서 대문 안에 잠시 들어가 경청재(敬淸齋) 현판만 바라보다 나온다. 주차장을 지키던 촌로 한 분이 다가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므로 더는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대문 밖 텃밭에는 낙화생 넝쿨이 무성하고 고추가 발갛게 익어가는 바로 옆에는 윤이 자르르 흐르는 가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독락당 살림살이가 넉넉해 보인다. 정혜사지의 십삼 층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독락당을 제대로 못보고 가는 심정이 아쉽기 이를 데 없다.

줄 땀을 쏟으면서 독락당 건너편에 있는 정혜사지의 십삼 층탑을 돌아본다.  이곳에 사찰이 세워진 이후 회재 선생의 가솔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 기도를 했을 터. 그러나 절 건물은 간곳없고 무심한 산천과 함께 탑만 남았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나무의자에 앉아본다. 꽤 먼 길을 걸은 끝이지만  다리가 아프기는커녕 힘이 씽씽 났다. 꼭두새벽부터 설친 때문에 시간도 넉넉하다.

버스를 타고 10여분 정도 달리자 양동마을이 나타난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을 바라본다. 그냥 푸근하다. 오래 살았던 곳에 돌아온 것처럼. 양동마을은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대표적 민속마을이라고 한다. 설창산에서 네 줄기가 뻗어내려  ‘勿’ 자형의 능선들이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고 산줄기를 따라 150호의 옛집들이 모여 있다. 이를테면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곳, 천지인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유교적인 마을이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연꽃이었다. 푸르게 넓게 펼쳐진 연지에 연꽃이 만발해서 그 귀족적인 풍모가 가히 매혹적이다. 연꽃은 꽃 중에 꽃이다. ‘處染常淨 芳花則果’ 라고 하던가. 즉 진흙 구덩이에 처해도 물들지 않고 꽃피자 곧 열매를 맺는 연꽃의 생리를 말한다.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 오염되지 않는 사물이 연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연꽃은 뿌리  줄기 잎 열매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고 한다. 또한 연꽃은 불교와 부처님을 연상시킨다. 부처님이 좌정한 곳이 연화대이고 해마다 초파일이면 불자들은 연등을 켠다.

오탁악세(汚濁惡世)에 몸담고 살아도 천박한 물신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양동마을의 지조와 절제 자긍심을 보는 듯하다.  연지를 중심으로 기와집 초가집이 정답게 어우러진 양동마을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이룬 조화와 공존의 풍경이었다.
무수히 만개한 연꽃 때문에 기분이 고조돼 있어 무작정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활짝 핀 놈, 봉오리 맺은 것, 분홍색 혹은 흰색 등등,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우산처럼 크고 너른 잎도 나름대로 멋이 넘친다. 연꽃에 심취해 있는 동안 온몸으로 환희심이 넘쳤다. 큰 소리로 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어진다.

연지를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관가정으로 갔다. 관가정에서는 저 아래 평야에 곡식이 자라는 모양을 내려다볼 수가 있고, 자식이 커가는 것을 보며 기뻐한다고도 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관가정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한 청년이 길을 막아섰다. 관가정 누마루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중이라고 했다. 돌아보니 흰 두루마기를 치렁하게 입은  어르신이  흰 수염을 나부끼며  어린이들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 보였다. 바깥 기척에 집중이 안 될 것 같아 얼른 나오고 말았다. 참 기특한 일. 이곳에 온 어린이나 보낸 학부모, 양동마을과 훈장님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교육이 갈수록 엉망이 되고 사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시대에 여름방학 단 며칠이라도 한문을 배우고 인성교육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행사다. 

이언적(李彦迪)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향단으로 허위허위 갔지만 소슬 대문만 올려다보고는 발길을 돌린다. 밖에서 보아도 집 구조가 아기자기하고 어딘가 여성적인 취향이 엿보인다. 여기 오기 전 어느 건축가가 쓴 글에서 양동마을의 풍수지리와 건축 양식에 대해, 특히 향단에 대하여 찬사와 함께 높이 평가한 것을 읽었다. 읽은 내용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높은 언덕에 있는 기와집 보다 길 아래 평지에 있는 초가집들은 대부분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있고 사진도 마음 놓고 찍을 수 있다. 나지막한 토담 밑에 접시꽃이며 봉선화, 일찍 피는 노랑국화 백일홍 맨드라미 등이 마당을 화려강산으로 꾸며놓은 정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큰 제사나 문중 모임이 있을 때 사용한다는 여강 이씨 종가인 무첨당으로 향했다. 각 구간을 안내하는 청동 표지판이 고급스럽고 기품이 있다. 특별히 길을 묻지 않아도 찾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한 점이 양반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마을 안길로 부지런히 걸어가 높은 언덕으로 한참을 올라갔다. 무첨당은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 는 뜻으로 후손들이 선조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주고, 조신하고 사려 깊은 언행과 모범적 생활규범이 느껴지는 곳이다.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이 우르르 처마 밑으로 몰려가고 양동마을 전역에 서성거리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우리는 내친 걸음이므로 비가 오든 옷이 젖든 상관없이 양동마을 지도를 펴보면서 답사를 계속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분인 이언적이 탄생한 서백당으로 오를 때는 가슴이 설렜다. 경주 손씨의 종가인 서백당은 이언적의 외가로 '참을 忍자를 100번 쓰면서 인내를 기른다‘ 는 뜻이라고 한다. 명당이라는 그곳에서 3인의 큰 인물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언적의 외삼촌 손중돈, 그리고 이언적, 아직 한 사람은 나오지 않은 상태라고 하던가. 서백당은 조촐하지만 분위기가 독특하다. 사랑채에서 서백당(書白堂)이란 글씨가 나그네를 사로잡는다. 그곳 마루 한 끝에라도 잠시 앉아보았으면 하는 소망조차 이룰 수가 없다. 더 보고 싶은 곳일수록  <이곳에 올라오지 마시오> 란 팻말이 버티고 있었다.

빗속에 천일홍 꽃빛깔이 선연하고 비안개가 무차별로 양동마을 전체를 휘감았다.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고, 돌다가 꺾이고, 비에 옷이 흠뻑 젖고 바지가랑이에 모래가 어석거려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흥이 나고 기운이 솟는다. 대체 그 까닭이 무엇인가.
생활하수가 흘러가는 도랑이 분명한데 그곳에도 수련 몇 포기가 당당하게 꽃을 달고 있다. 야생 미나리도 기가 살았다. 여뀌도 연꽃에 질새라 기후, 토양 등 알맞은 생존조건에 힘입어 긴 꽃술을 제멋대로 척 늘어뜨리고 있다. 부러운 모습이다. 복작대는 서울 도심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중생보다 이곳에 터 잡은 식물, 회화나무 배롱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그리고 밭작물과 뜰 안의 일년생 화초들까지 무한히 안락을 누리는 모양새다. 

현대에는 드물게 참된 평화와 여유를 누리는 마을이 양동마을이 아닐까 싶다. 뭇사람이 지나가도 짖지 않는 개가 그렇고, 골목에서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도  무던하고 참한 인상이다.  ‘勿’ 자 형상의 명당에 자리 잡은 여주 이씨와 경주 손씨의 집성촌인 양동마을, 사람으로서 사는 도리가 그곳에 몽땅 숨어 있는 것만 같다. 100년 전통의 양동초등학교 역시 교문 안에 우뚝 버티고 선 세종대왕 동상과 그 앞에 흐드러진 무궁화 꽃에서, 또 시멘트 아닌 기와로 인 건물 지붕에서 나라사랑과 학교사랑의 올바른 정신을 갖춘 교육현장임을 실감나게 한다.

양동마을에 살고 싶어라! 구호라도 외치고 싶게 양동마을의 매력에 푹 빠졌다. 양동마을엔 평화가 있다. 우주만물과 동화한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