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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갔다

능엄주 2022. 7. 5. 20:09

백화점에 갔다.

 

며칠 전 백화점에서 전화가 왔다. 카드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카드를 재 발급해 드리겠다. 카드를 우편으로 받겠느냐, 아니면 백화점을 방문할 것이냐고 물었다. 바로 전날은 코로나19 이후 거의 발길을 끊은 것과 마찬가지인 매장에서 세일 행사를 알려왔다.

세일 행사때는 당연히 백화점 인근에 사는 여인들이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단체로 몰려갔다.  걸어서 10분 정도면 백화점엘 갈 수있었다. 백화점이 집 가까운 데 있어 이웃들과 오며 가며 놀이터처럼 자주 들렸다. 살림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백화점의 우아한 환경을 누렸다. 매번 홀린듯이  옷을 사는것은 재은이 엄마였고 성격이 화끈, 쾌활한데다 옷을 사서 기분이 좋은 그녀가 밥을 사곤 했다. 

 

사람들은 옷 샘이 많은가. 평소에 눈여겨보고 값이 비싸 망설이던 물품 말고도 충동구매도 잘 한다. 견물 생심, 보이는게  다 예뻐 보이는가.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옷을 고르는 모습이  매우 진지했다. 세일 판매는 우수한 물품이 꽤 많았다. 세일 행사를 위해 급조된 것이 별로 없고 쓸만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옷사는 것 말고도  나는 현숙 여사 하고 만나면 백화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몇살 많았고 남편은 고위직 공무원이었다. 그녀는 자상한 올케성님처럼 나를 챙겼다. 내가 아플 때 밑반찬을 해서 큰 쟁반을 들고 길건너 우리집에 오셨다. 우리 가족이 피서를 가면 우리집 강아지도 맡아 주셨다. 그뿐이 아니다. 그녀의 부군이 워싱턴에 근무할때 나에게 글을 쓰려면 여행도 해야한다면서 아예 미국에 와서 자기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다.  수술하고 꼼짝못하고 자리 보전할 때였으므로  호기를 놓치고 말았지만 친척이래도 그렇게 하기는 쉽지않다. 

 

현대백화점에 들어서기  바쁘게 엄청난 인파를 만나게 되었다. 코로나19 발생이후 최초로 사람들이 벅신거리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사는 맛이 난다고 할까. 세일 행사의 북새통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돌입?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 옷이 그 옷이었다. 눈썰미가 있거나 몸이 날씬한 여인들은 잘 선택하는것 같은데 나는 집콕 이후, 허리가 굵어져 웬만한 사이즈는 맞지 않는다. 나는 책 나오면  우선 집을 떠나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다. 무료숙박에 선물까지 주신다는 최고 명당에 사는, 구운몽원에서 만난   L  여사님 한테 다녀오고 싶다. 근래 옷을 사 본일이 없다. 산뜻한 옷 한 벌 구입할 뜻이 있어 백화점에 왔는데 고급스러우면서 심플한 옷이 내 취향인데  다 그저 그랬다. 리본, 레이스, 반짝이, 이상한 무늬 등, 매장을 이곳 저곳 둘러 보다가 이내 발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식당에도, 찻집에도 사람들이 빼꼭하게 들앉아있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사람들처럼 평소보다 몇 단계나 뛰어넘은 고음의 목소리가  와글와글 들끓었다. 활기가 넘치고 즐거워 보였다. 많은 사람들 속에 나의 지인들이 안 보이는 게 아쉬웠다.

 

나는 10층까지 올라가 의자에 앉았다. 한 분은 우리나라 최고라는 실버타운에 계시고, 또 한 분은 치매로 양로원에 입소했다고 한다. 세월이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다. 생명의 연한이 줄어들면서 각자의 삶의 형태가 변화한 것이다. 그처럼 활발하고 호기롭던 재은 엄마의 기상이 어찌하여 치매에 걸리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현숙 여사는  식사시간에 맞춰서  옷 떨쳐입고 나가는 것이 불편하고, 실버타운에서의 생활이 별로라고 하더니 최근 소식이 없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나는 차 한잔 뽑아 들고서 천천히 마시며 추억에 젖는다.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는다더니  그말이 현재의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 아무 것도 안 샀어?

매일 그 시간, 나의  출타 점검을 하는 사유가 물었다. 

  - 그래! 아무 것도

나에게 백화점은 앞으로 어떠한 추억도 만들지 않을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