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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렇게

능엄주 2022. 6. 12. 21:18

나 이렇게

 

나 이렇게 수 십, 수  백 번 본 원고는 일찍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전에는 교정 보완 수정 퇴고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고작 문장과 철자법에 치중했다 할까. 예전에  교수님 서책 만들 때 원고를 하루 200자 원고지 100매씩 쓰고 나서, 인쇄소까지 달려가 밤을 지새며 교정을 본 적은 있다. 내가 혹 실수라도 하면 교수님 체면이 깎일까 염려해서 였다. 내 순수한 성의이기도 했다. 책이 세상에 나오자 나에게 어떤 실수도 없다는 게 판명되었고, 그래서였던가. 스스로 자신감이 있었던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 후 퇴고에 그다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않았음을 시인한다. .

 

저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글에 취해서 오타 오류를 미쳐 발견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줄 모르고 범하기도 한다. 편집자를 잘 만나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까. 전적으로 편집자에게 일임할 성격의 일도 아니다.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3회 내지는 5회까지 교정을 보았어도 나중 출간된 책을 보면 오타가 또 발견된다.

 

그런데 이번 책은 참으로 나에게 엄청난 요구를 했고. 내 스스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필연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더 잘 쓰도록, 더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되도록  나에게 강 훈련을 시킨 것인지도 혹 모른다. 나 이렇게 한 작품 완성하기가 몹시 힘든 줄 잘 몰랐다. 쓰기만 하면 글이 저절로 되는 줄 쉽게 생각했던가. 스스로 자신감에 취했던가. 그건 전혀 아니었다. 나는 늘 조심하고 신중하게 살펴왔다.

 

한 열흘 동안 나는 한 작품에서 손을 놓았다. 더 볼래야 더 볼 수 있는 근력이 달렸고, 2020년에서  2022년까지 햇수로는 3년 째 접어들었다. 그 3 년 여 동안 나는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어떤 사람은 슬 슬 놀면서, 영화도 드라마도 다 보고, 친구랑 산책도 하면서 글을 쓴다고 한다. 또 어떤 선생님은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하루 일정한 분량을 쓴다고 했다. 나는 놀면서도 안 되고, 규칙적으로도 안 되었다. 글이 되는 시간이 있고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글을 쓸 수 없는 때가 있다.  

 

그동안 몇 권의 책을 저작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글 내가 쓰는 것이 아니고 쓰여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없는 이치와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게 마음 먹은대로 된다는,  이 역시 어떤 막강한 다른 에너지, 원리가 작용한다고 믿는다. 내가 온전한 내가 될 때 글도 나오고, 작품이 완성된다고 보는 견해이지만 나의 노고 그 이상의 어떤 다른 힘. 다른 조화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나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는 변설이 어디에 허용되는가. 겸허하게 글을 쓰고 글을 다루고 책을 만들고 하는 모든 절차가 온전한 내 뜻, 내 임의로 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흔히 경지에 오르지 않고는 우수한 작품을 창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이름인가. 나 이렇게 힘들 줄 정말 몰랐다는건 그 경지와는 상관성이 없는 것인가.

 

오늘 저녁 나는 너무나 무섭게 또 한 번 내가 쓴 글, 3권을 1권으로 압축하느라 고생한 글을 다시 보는 중에 이처럼 말이 길어지고 있다.  나 이렇게 눈물나고 힘들었다. 내 생애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 과정인 것 같다. 여러 차례 샅샅이 훑어 보았어도 발견하지 못하다니, 오타 오류도 보이는 때가 따로 있는가. 오늘 보기를 참 잘했다. 이 밤, 나 이렇게 다리를 뻗고 잠들어도 좋을까. 나에게 내가 위로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