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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다

능엄주 2022. 6. 11. 12:31

눈 부시다

 

5월 여행이  내 가슴 속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4월에서 종료될 줄 알았다. 게으름 피운 적은 없다. 아파서 쉴 겸 가끔 집밖으로 잠깐씩 나가기는 했다. 나가보아야 인사동이고 조계사였다. 어떤 때는 옛 풍문여고 길을 걸어올라가 정독도서관  등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보기도 했다. 사람을 만난 것은 한두 번이다. 연 전시회에 멀리 지방에서 오신 한학자와  오랜 도반을 만난 일, 정발산 우아한 동네 출판기념회, 그리고 내 친 형제보다 더 정다운 연희동 후배 집에 간 것 등이었다. 

 

더도 말고 2박3일의 여행을 도모하고자 했는데  분망 중에 임인년  5월이 내 곁을 지나갔다.  5월은 흔히 신부의 계절, 연인들의 계절이라고 한다. 문득 알츌 랭보의 '들길을 거닐며' 가 떠오른다. 

 

푸른 여름밤 보리향기에 취해

플잎을 밟으며 들길을 거닐면

마음은 꿈꾸고 다리는 가벼워

내 이마엔 산들바람이 머문다

내 말없고 생각 없음은  오직 한 없는 사랑

내 가슴속에서 용솟음침이니

머물 곳 없는 나그네처럼 내 멀고 먼 곳으로 가리라

연인과 함께 가는 양 자연과 함께 걸으리라

 

5월은 천지에 이팝꽃 흐드러지고 연초록의 신화가 펼쳐진다. 그때를 당하여 나는 먼 곳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바다가 있고 평야에 보리밭  물결치는 청산도 같은 곳이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내가 나의 벗이 되고, 정인( 情人)이 되어 예쁜 돌꽃이 반짝이는 길을 홀로 걷고 싶었다.

 

이제 6월 중순이다. 장미꽃이 피어나 도처에서 그 정열을 발산한다. 가뭄 해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비가 자주 내렸다. 비가 여우비처럼 오다말다 재주를 부릴 때마다 나는 행여 무지개가 뜨지 않을까. 저 산 넘어 하늘가에 무지개가 뜨면 선녀가 무지개 다리를 밟고 하강한다는,  나는 무지개의 출현을 고대하곤 했다. 일곱 가지 색깔의 무지개가 마치 현재의 내 희망인 것처럼. 언젠가 그렇게 나는 비 그친 저녁 즈음하여 무지개를 만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다시 마귀의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던가. 손에서 일을 놓아 긴장감이 풀어져서인가. 요즘 거의 왼손에 이어 오른손이 아파 징징 울고 지낸다. 여행? 꿈도 꾸지 말아라다. 뼈가 아플때는 뜨거운 물이 좋지 않다더니 매일이다시피  촛물에 담그는 내 양손이 오히려 통증이 배가(倍加)된 듯하다. 퉁퉁 부어서 계속  아프다고 호소한다. 밤 12시가 넘자 안되겠다 하고 진저리나는 진통제를 또 먹었다. 오늘 정형외과는 결석하기로 한다.

 

창밖이 매우 호화롭고 눈부시다. 나는 초록이 뿜어내는 생기에  힘을 얻고 있다.  비가 개이면  신록이 더욱 푸르게 우거져  만사만물이  싱그러운 기운을 발산한다. 더욱 먼데로 떠나고 싶어진다. 나는  5월 23일 부터 6월 8일까지 학교 끝나고 배고프다고 우리집으로 달려오던 녀석에게  문자를 날렸다. 친구집에서 강아지를 데리고와서 돌보느라고 녀석은 집으로 직행한다고  아들이 대신 문자를 보내왔다.

-- 어려서는 앵무새를 기르고, 초등학교 때는 도마뱀을 기르더니 지금은 강아지라고.

아들은 녀석의 고집을 말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들에게도 녀석에게도 내가 많이 아프다는 말대신 강아지 잘 기르라고만 문자를 했다.

 

쉬고 싶은건 몸 보다 마음이었다. 내 영혼의 요구였다. 신록이 눈부시다고 말할 게 아니라 체험하러 길을 떠나자. 집은 나에게 휴식의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 상당유치원 동창 靜子!  그렇다. 우리는 오래 전 약속한 게 있다. 둘이서 오붓하게 떠나보자는. 손가락 통증이 점점 온몸으로 번지므로 서둘러 실행에 옮겨보면 어떨까. 나는  탐색 중이다.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여전히 눈부시다. 바람결에 춤추는  나뭇잎들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지 않은가. 손가락이 퉁퉁 부어도, 그래도 어서 떠나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