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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묘소墓所에 가다

능엄주 2022. 6. 6. 19:25

동생 墓所에 가다

 

비가 온다는 예보였다. 낮에는 그친다고 했다. 중간에 그친다고 해도 믿기 어려웠다. 비가 내려도 약속 날자를 변경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  내 몸이 더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출판사에 원고 보내놓고 줄곧 앓았다. 설마 죽기야 할라고, 전에 암을 앓는 친구가 보내준 Advil 한 캡술 먹었다. 정히 못견딜 때만 한 알씩 먹으라는 거였다. 기왕 맘 먹은 거 그냥 가보는 거다. 동생이 세상을 뜬지 만 일년이었다.  

시나브로 내리던 비가 집을 나서자마자 험상스러운 소나기로 변했다. 막 쏟아붓는다. 과연 갈 수 있을까. 건강 생각해서 옷을 좀 따숩게 입고 집을 나섰는데도 오실오실 한기가 돋았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운동화, 바지, 자켓, 머리칼에 온통 빗물이 흐른다. 우산이 바람에 날려 우산대를 꽉 붙잡았으나 허탕이다.

 

미친듯 폭우를 퍼붓더니 옥수역을 지날 때 쯤 비는 그쳤다. 요즘의 비는 국지성 호우라고 하던가. 같은 하늘 인데도 의정부 다르고 강원도 다르고 서울 다르다. 어디서는 비가 퍼붓고 어디서는 흰구름이 둥실 떠 있다.

양재역까지 80여 분 걸렸다. 계단을 힘겹게 올라오니 玟이가 이미 와 있었다. 함께 걸었다. 신분당선쪽으로 가는 길은 전에 지방으로 세미나 갈 때 와 본 곳이지만 그 사이 많이 변해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 두리번거린다. 하필 엘리베이터를 차단해 놓아 빙 돌아서 계단을 오르는데 숨이 가빴다.

 

이천행 버스는 30분 배차라 한다. 30분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비가 내렸다. 목안이 따겁고 기침이 솟구친다. 얼른 사탕 한개를 입안으로 넣어주었다. 기침이 마스크 밖으로 튀어나오려다 중지한다. 오늘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내 어쩌다 동생 묘소에 가는 형이 되었나?  스멀스멀  분노가 치밀었다. 동생이 세상 뜨고  얼마 안 돼 다른 여인에게 미쳐 아내의 묘소에 가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珉이 아빠를 생각하니 보편적인 세속의 윤리와 인정을 떠나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다.

 

동생의 삶은 시종여일 철저하고 성실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사회 봉사도 10여년 넘게 했다. 늘 고민에 빠져 우울하게 지내다 병을 얻었다. 병원과 의약이 별다른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느 지점에서 살아갈 의욕을 잃은 것 같았다. 아예 살기를 거부한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성당 교우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동생보다 연장자로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거북했다.  나는 동생의 마지막 가는길을 지켜보며 눈물을 삼켰다. 입관 절차가 끝날때까지 눈 부릎뜨고 자리를 고수했다. 

 

신촌 살 때 우리 앞집 부인이 타계했다. 두달 못돼서 그댁 남편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동네 사람들이 골목에 나와 앉아 수군거렸다. 해도 너무 한다고. 얼마 후  그댁 아들 삼형제가  집단 가출했다. 아예 집을 박차고 나가 독립을 한 것이다. 다시는 그들의 아버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말했다. 부인이 살아있을 때부터 피운 바람이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멀쩡하던 부인이 졸지에 죽음으로 갈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생 네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어제 오늘 사귄 여자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니 장례식장에서 동생의 남편은 룰루랄라로 보여 이상스러웠다. 눈물은 고사하고 기쁜 표정이 얼굴과 몸 전체에 묻어났다.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이혼을 하지. 함께 살면서 피를 말린 것 아닌가.

 

여주에서 버스를 내려 빗속에 산등성이를 30여 분 올라갔다. 차가 들어가기도 좁은 구불구불한 산길이 이어졌다. 가까운 듯 하면서 솔잎이 쌓인 길은 미끄럽고 멀었다. 인가도 별로 없고 뒤죽박죽으로 어우러진 풀나무가 도로를 점하고 있어 헤쳐가며 걷는데 진땀이 났다.

 

그나마 딸 한 명이 있어 한국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간병하고, 임종을 지키고, 이렇게 묘소에  올 수있어 감사하다고 할까. 일찍이 이민간  아들은 기별도 없다고 했다. 남편도 아들도 소홀히하는 동생의 죽음이 애달펐다. 무덤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다른 묘소들은 근래 사람들이 다녀간 듯 깔끔한데 유독 동생의 무덤만 잡풀이 우거져 있었다. 그렇다고 낫을, 호미를, 꽃삽을 지니고 온 것도 아니니 珉이와 나는 맨손으로 잡풀을 뽑았다. 여중女中시절  이후 처음 풀을 뽑아본다. 망초는 쉽게 뽑히는데 생전 처음보는 그 풀은 질기기가 노끈보다 더했다. 손바닥이 찢어질 것 같았다.

 

겨우 무덤을 고르게 정리한 후  술과 안주를 진설하고 절을 올렸다. 눈물이 난다. 여자의 일생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무겁게 생각했다. 우리 시대는 그게 정설定說이었는지 몰라도 오직 시집과 남편, 자식이었다. 현모양처가 무슨 벼슬인 줄 알고 살아온 동생의 삶에 박수를 쳐줄 수가 없다.  나는 동생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늘나라 가서는 좀 멋지게 살으라고. 다시 태어나면 남자가 되어 온전한 자기자신의 꿈을 펼쳐보라고.

 

어느새 비는 완전히 멎고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무수히 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보니 올라갈 때는 미처 눈여겨 보지 못한 장미꽃넝쿨, 금계국, 쑥부쟁이 무리가 곳곳에 너무나 황홀했다.  마치 동생의 이루지 못한 소녀시절의  찬란했던 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