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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밤

능엄주 2016. 2. 1. 08:53

밤에 내리는 눈은 도둑 눈이다. 소리소문 없이 내려 쌓이니까.
초저녁에 쓱뜸을 손바닥에 올리고 잠깐 잠이 들었더니 애들 오는 소리에 그만 얕은 잠을 깼다. 방 밖으로 나와 아침에 나갔던 애들을 다시 만난다.

창밖으로 보이는 H 중학교 운동장이 달빛인 듯 환했다. 보름 지난 지가 꽤 되었는데 설마 달빛? 하면서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었다.  마치 도둑처럼 기척도 없이 깊은 밤에 내리는 눈.

동쪽 창으로 보면 시베리아 눈벌판이 펼쳐져 있고, 서쪽 창으로는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오월의 과수원이다. 눈부시다  황홀하다 라는 표현의 말이 거추장스러울 만큼 일품 경치다.

단풍나무 목련나무 개살구나무 라일락나무 소나무 등 아파트 단지에 심겨진 모든 나무는 그냥 눈나무다. 나무마다 굳이 고유한 그들의 이름을 불러줄 필요도 없이 몽땅 눈나무(雪木)로 불러주어도 무방할 듯하다.

눈위에 눈이 하도 내려 지겹다는 강원도 사는 친구의 말이 그리 심한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겨운 정도를 지나 이제는 두렵기조차 하다고 했던가. 눈이 와도 이따금 기다리는 묘미도 던져주면서 적당히 간격이나 분량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인가.

올 겨울 들어 기후변화의 징후가 더욱 확실해진 감이 있다. 이처럼 눈이 자주 많이 쏟아진 건 98년 이후 순복음 교회 집사 시절 대규모 성령대망회가 열리던 날을 제외하고 내 기억에는 거의 드문일에 속한다. 하루 걸러 폭설이라면 질리지 않을 사람 누가 있을까.

정형외과에 골절상을 입은 환자가 예년에 비해 20배나 증가했다는 소식을 저녁 뉴스에서 보았다. 설경이 제아무리 아름답고 신비하다 할지라도 이건 지나친 것 아닌가.
그렇다고 인간의 힘으로 이와 같은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와 그 피해를 막아볼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안타깝다.

얼음길에 미끄러져 죽도록 고생한 전력이 있어 눈이라면 무조건 겁부터 난다. 전에 부러졌던 부분들이 비나 눈오는 밤이면 아우성치듯 통증을 호소하므로 거의 잠을 설치기 일쑤다. 눈쌓인 밤에 혹 무슨 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1.4 후퇴 당시 처절하게 퍼붓던 진눈개비도 기억나고, 요즘 Tv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북한의 수상한 움직임도 떠오른다. 그래저래 오싹  공포감마저 든다.

사진 속의 개도 눈에 홀린 것 같다. 도둑이 들라면 개도 안 짖는다고 했던가.
온세상이 백색의 정물화다. 감상할 여력이 못 미치는 정물화! 도둑처럼 나의 안면을, 휴식을 침범한 최상의 설경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지금이라도 눈발이 뚝 그쳐주었으면, 그래서 설날 아들과 그의 가족들의 상경길이 미끄럽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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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13-02-06 08:36
교도관 생활은 하던 제가 제목만 보고 그놈을 붙잡아 혼내고 교정교화 하려고 했더니마는 하나님의 조화라니요.저도 비교적 젊은 층의 여성들에게 물었지요 . 눈오니 좋지요? 했더니
한결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좋은데요 하고 씁쓸하게 웃고 말았지요
어떻든 간밤의 예보가 빗나가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는 그래도 눈와서 손녀와 눈사람도 만들고 그랬습니다. 감사합니다.

변영희  13-02-06 08:47
2007년 겨울  한밤중에 H 중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서 눈사람 만들던 추억!
태어나 처음 눈사람을 만들어 본 손녀딸이 눈사람을 베란다에 모셔놓고 너무 좋아서 잠을 못자요.
그런 낭만도 있긴 하지만 반가운 것도 정도가.
임재문 선생님 즐거운 설 명절 되십시오.

임재문  13-02-08 22:01
눈내리는 밤 영화가 생각납니다.. 어렸을적에 제 초딩때 본 영화인데 아스라이 생각이 납니다. 자기의 아들에게 재판을 받는 어머니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변영희 선생님 ! 감사합니다. 명절 잘 보내세요. 제목이 바뀌어서 다시 씁니다.

     
변영희  13-02-11 11:01
눈 내리는 밤에는 영화관에 직접 가는 수고 대신 그렇네요. 따뜻한 집안에서 영화 보는 재미도 꽤 괜찮겠어요.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ㅋㅋㅋ
몇 년 전 겨울, 밤이 새도록 중국 드라마 < 황제의 딸> 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특히 그 드라마의 주인공 자미공주로 분한 제비에게 완전 빠져서요. 제비 같이 발랄 솔직 청순한 여인을 꿈꾸면서요.
고맙습니다. 계사년이 활짝 밝았습니다. 선생님 행복하세요!!

일만성철용  13-02-09 20:24
변작가님의 글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문장이 수려하고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고 도중 도중 멋진 표현이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제가 노력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면 변 작가는 타고 난 재주로 글을 쓰시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독창적인 표현의 묘미에 감탄하게 되거든요.

     
변영희  13-02-11 10:55
"니들 내일 몇 시 차냐?'
쿵쿵 겁없이 뛰어다니는 손자녀석들에게 이게 할 소리인가 안 할 소리인가? 따져보게 하는 층간소음 시비!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사람이 무서운  세상입니다.
성철용 선생님! 설 명절 즐거우셨나요? 난리북새통을 한바탕 치루어내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날.
선생님 웬 칭찬의 말씀을?  늘 부끄럽습니다.수행이다 공부다  이런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올해도 건강하시고 두루 여행 다니시면서 좋은 글 많이 쓰시고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박원명화  13-02-13 01:15
변영희 선생님 설연휴! 잘 지내셨는지요. 한편의 짧은 소설을 읽은 듯, 금방이라도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모두가 잠든 밤, 홀로이 내리는 눈, 아마도 외로울 것 같습니다. 어수선한 세상을 덮어버릴 기세로 내리는 눈의 위용이 세삼 무서운 요즘입니다. 올해처럼 춥고 올해처럼 눈이 많이 내린때가 아스라이 먼 옛날 같은데, 낭만으로 느끼던 눈이 왠지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 세월탓일까요?

변영희  13-02-14 07:08
계사년이 밝았습니다. 설날이 지나야 진짜 계사년이라네요.
눈이 오면 들개? 처럼 거리로 달려나가던 때가 그 언제였던가. 집에 들앉아 미끄러운 길 걱정이나 하다니! 세상 다 산 것처럼 허무하군요. 하긴 올 겨울에 눈도 너무하기는 했어요. 그렇지요? 과유불급!!
고맙습니다. 어서 봄 이 오면 좋겠습니다.

정진철  13-02-15 18:29
눈도 서설이었으면 감사할텐데 폭설이 되다 보니
눈조차 욕을 먹는 것 같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날. 펑펑쏟아지는날, 산에 올라가보면 그래도 아름답기는 합니다
온천지가 하얗게 덮여서 산등성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떨때는 제가 서있는 곳이 하늘인가 착각하기도 한답니다 ㅎㅎㅎ

변영희  13-02-15 18:57
문학의 집 서울 오늘 2013년 첫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 시인들 함께 가자하는데 이 몸은 집에 앉았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구덩이가 을씨년스럽고 유독 남산이란 데가 한여름에도 한기가 도는 곳이라,. <오년 후> 재판 찍으려고 교정보는 일도 급하고요. 재판 나오면  만나고 싶은 사람 내가 선택해 볼까요? 나는 그 <오년 후>의 지윤미가 이뻐 죽겠어요 ㅎㅎㅎ
정진철 선생님 암튼 이건 약간 數多지만요. 수다도 항상 떠는 건 아니니 굽어살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