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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데서 전화가

능엄주 2022. 4. 5. 23:34

먼데서 전화가

 

오늘은 새벽부터 기분이 저조했다. 원고 작업을 마무리하고 손을 농아서인가. 갑자기 시간이 강물처럼 밀려와 주체하기어려웠다. 미세먼지가 심하지 않으면 잠시 조계사에 가서 향 피워 올리고 탑이라도 돌고 올까 싶었다. 법당에는 일일이 체온 재고 뭐를 쓰고 귀찮다. 밖으로 마음을 돌리면 덜 우울할 것 같았다. 마침 먼 시골에 사는 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 자식 다 소용없어요!

전화를 귀에 대자마자 그분이 말했다. 음성이 약간 격앙되어 있었다.  그분의  한 아들은 외국 나가 살고 있고 한 아들은 서울에 산다. 자식이 소용없다 소리를 그분은 근래 자주 하셨다. 오늘도 똑같이 그 말씀이었다. 자존심이 워낙 강한 분이라 여간해서는 자식이야기, 더구나 조금이라도 언짢은 이야기를 전에는 한 적이 없다. 집 두채를 팔고 가지고 있던  모든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고 본인은 행복아파트에서 조촐하게 사신다. 

 

- 왜? 무슨 일이 있으세요?

- 아니 나만 그러는게 아니고요 앞동, 옆집 다 그렇게 말한다고요. 

어젯밤 나에게 걸려온 전화는 또 다른 분으로 그분은  있는 것 다 털어주고나서 어쩌다 친구를  만나도 점심 한 끼 대접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게 왜 다 털어 주셨어요? 

나는 그분의 화를 돋우는 것 같아서 속으로만 대꾸하고 가만히 있었다. 밤 10시가 지났는데도 그분의 점심 한끼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많이 섭섭하신 것 같았다.

- 글세 늙어가는 부모 돌볼 생각은 안하고 계산만 하고 있다니까요?

그분은 밤이 깊은데도  쉽게 전화를 끊지 않았다. 

 

오늘 전화하신 그분은 아직 자식들에게 더 줄 게 남아있어서인가. 줄게 더 있어야 자식들이 찾아오는 게 아닌가.

워낙 검소하고 알뜰한 분이었다. 별장 같은 큰 집에 살때는 뜰에 무화과 뽕나무  감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에다 땅 바닥에는 냉이며 민들레 쑥 질경이 등이 화초와 함께 지천이었다. 나는  몇 년 전 지리산 움막에 가는 도중에 그 큰 집에서 하루 묵은 일이 있다. 제법 건축자금을 많이 들인 잘 지은 집이었다. 집관리가 힘들어지자 큰 집 두 채를 서둘러 정리하고 행복아파트에 입주하여 그런대로 노후를 편안하게 지낸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침 부터 왜 자식  다 소용 없다고 구호 외치듯  하시는지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요즘 가족 해체, 각자도생, 어머니 시대 끝, 이런 단어들이 뜬다. 스마트 폰이 생기면서부터 그런 이야기가 주변에서 자주 터져 나왔다. 명절에 고향집에 가도 마주 앉아 정다운 대화를 나누기 보다 눈이 빠지도록 스마트 폰애 코를 박고 골몰하다. 수년 전 C 법사는 스마트 폰 하나만 있으면 방송국도 하고, 사장도 하고 뭐든 못하는 게 없다고 말했다. 바로 그런 세상이 된 것이다. 무슨 말씀이든 어른의 말씀을 들으려는 그런 시대는 벌써 중쳤다. 말씀은커녕 마주 앉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혹여 그런 상황에서 과거의 일을 꺼내거나, 교훈적인 , 무엇을 가르치려는 말이라도 나오면 자리를 피하거나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다. 오로지 스마트 폰이다. 

 

그런 세태이고 보니 그분은 마음이 상했던가.  봄꽃이 예쁘게 피어나 사진을 찍어 아들에게 카톡을 해도 아무런 답이 없다고 푸념했다. 그게 뭐 그리 마음상할 일일까. 나는 그  시인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바가 많은 것에 놀랬다. 결혼해서 떠난지 어제 오늘도 아닌데, 요즘 아들은 처갓집 데릴사위라 하지 않던가. 데릴사위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아예 상머슴이다.  

나는 수년을 생일이나 명절을 홀로 지내왔다. 홀로에 맞추어서 살다보니 새삼 쓸쓸할 것도 서운할 것도 없이 무뎌졌다. 애시당초 가족관계는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애쓴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애쓰지 말고 다른 일에 나를 투자하는 것이현명하다.  결혼의 무덤이라는게 바로 이런 것인가 허털할 때도 있지만 어차피 인생은 홀로다. 한 지붕아래 있어도 만능의 스마트 폰이 이전의 오붓함과 단란한 기억을 삼켜버렸다. 

 

먼데서 온 전화로 오전 시간이 허무하게 흘러가버렸다.  아직도 그 시인은 순정을 간직한 60년 대 소녀같았다.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까지 와서 전화만 하고 얼굴은 볼 생각도 없이 가버린 그분의 아들내외도 조금 심하기는 하지만  섭섭하게 여기는 쪽에서 체념하는 것이 상책이다.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을 불효자로 만든다는 어느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별장 같은  큰 집 두채를 매도한 다음 현찰을 갖고 계시던가, 좀더 신중하게 재산처리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근처까지 왔다가 모친을 만나지도 않고 전화만 했다는 것은 코로나 19 상황이지만 조금 심한 것이 맞다.  노인은 '밤새 안녕하시냐?'라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분은 나에게 이야기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지셨다고 한다.

 - 그러게 쓰던 시 작업이나 마저 하시고 다 잊으세요.

내 말이 그분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내가 혹 동지처럼 인식되었을까? 21세기 노년의 삶이 애달프다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