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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

능엄주 2022. 1. 30. 00:59

24시

 

왼쪽 귀 뒷부분의 머리가 심하게 아파서 아침 밥도 거르고 바이엘 아스피린 한 알을 먹었다. 독해서일까. 나는 당장 아랫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말이 살살이지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다. 언제나 양약 종류는 나를 괴롭혀왔다. 부득이 해서 먹은 건데 효과 대신 배 아픔이 더 못 견딜 일이었다.

어쩌면 나의 뇌혈관에 피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서인가. 편두통이 얼른 완화되지 않자 나는 노상 읽기 좋게  펼쳐둔 장장 700쪽에 이르는 책을 바라본다. 책이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다.

 

TV를 켰다. 머리 아픈 게 배 아픔으로 이동한 것에 대해서 TV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재미가 있어야 아픔을 잊을 수가 있는데 재미는 고사하고 단지  소음으로 간주되었다. TV 를 끄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섣달 그믐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현실을 하소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설사 그럴만한 사안이 된다고 해도 모두 설날 준비로 바쁠 때가 아닌가. 

 

나는 배를 움켜쥐고 쪼그려 앉아 책에다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음으로는 급한데 아주 느리고 답답하게 활자를 훑어 나갔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배 아픔이 점차 스러지자 더욱 읽기에 골몰했다.

'서포'가 나오는 대목에서 정신이 말갛게 개이는 것을 느낀다. 나는'서포'를 왜 그렇게 애호하는가? '서포''의 글에 매료되는 것은 현재 상태에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대목은 노트에 메모를 하면서 반 넘어 읽었다. 책이 나를 살려주었다.  더 정밀하게 판단하자면 '서포'가 나를 아픔으로부터 구원해 준 것인가. 나는 귀중한 자료를 착실하게 섭렵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너무나 어렵게 여겨졌다. 중국 문학에서 웬만큼 낯이 익은 인명과 지명이었으나 그 사건의 전모는 단편적인 글만 가지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여고 시절 국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무조건 소리내서 읽어라! 몇 번 읽다 보면 뜻은 저절로 알게 된다. 이북에서 단신 월남한 국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공부 요령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나는 그저 심신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일반교욱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고교만 제대로 졸업해도 인생살이는 중분하다'고 설하신 국사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 읽고 또 읽어라. 국사 선생님은 오직 독학으로 고교 교사가 되었노라 말씀하셨다. 

 

바야흐로 24시였다. 오늘이 아니라고 말 못하고, 어제라고 단언하기도 어정쩡한 시각이었다. 나는 이제 편안한 꿈 나라로  향해야 한다. 참으로 아픔도 슬픔도 슬기롭게 잘 넘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