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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외출

능엄주 2022. 1. 21. 11:26

피할 수 없는 외출

 

안 나가면 그만인데 왜 하필 글 제목을 피할 수 없는 외출이라 했는가.

마음으로는 나가고 싶지만 나갈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그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바로 빙판이 원인이니까. 우리 동네는 한 번 눈이 내리면 서울특별시에 비해서 늦게 녹고, 숫째 잘 녹지 않는다. 서울보다 기온이 3도 이상 더 내려가는 게 그 중요 이유이지 싶다. 더구나 그늘 진 곳은 봄이 올 때까지 빙판을 고스란히 유지시킨다.

 

나는 20여 년 전 빙판에 넘어져 골절상으로 4개월 동안 정형외과에 누워 살았다. 아주 심한 골절이었다. 생뼈에 쇠꼬챙이을 박아 놓고 뼈가루가 붙기를 기다려야 하는 난제 중 난제였다. 생뼈에 쇠꼬챙이를 박은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통증을 초래했다. 하룻밤 사이에 내 머리칼은 하얗게 변질되었다. 밤 내내 잠을 못 자고 병동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다. 부러진 팔을 일차 방문한 병원에서 술에 취한 닥터가 억지로 끼어 맞추려다가 오히려 뼈를 더 으스러 뜨렸기 때문이었다. 뼈가 으스러졌으니 쇠를 박아 뼈를 모으는 그 방법밖에는 달리 뼈를 이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대로 두면 비뚜러진 팔이 된다고 했다.

 

밤중에 산길을 내려오다니 잘못은 바로 나에게 있었다. 봄이었지만 태백산 오지에는 낮밤없이 눈이 내려 쌓였다. 낮에 햇살이 비칠 때는 녹는 듯 하다가 저녁무렵에는 다시 그 녹은 멀음 위에 눈이 내리면서 미끄럽기가 훨씬 더했다.  산길은 반들반들 윤이나는 유리알이었다. 아무리 주의를 하고 조심해도 열이면 열 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앞에서 한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신호로 주르르르 뒷 사람들이 넘어지게 된다.  스무하루 기도에 동참하라는 스님의 말씀을 거역하기가 현지에 가는 것보다 나는 더 어렵게 느껴져 스님의 권유를 따랐던 것이다.

 

그 해 얼음판에서 넘어진 후 나는 눈이 오면 무조건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경치고 낭만이고 찾을 겨를이 없다. 다리가 불불 떨리고 몸이 움츠러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다리가 불불 떨려도 나가야 하는, 어쩌면 이것이 나의 2022년을 예감하는 계기, 혹 다가올 지도 모를 호운의 기회에 맞닿을 수도 있는, 그러나 밖을 내다보면 그런 기대는 사라져간다. 영하 12도면 얼음 길이 쉽게 녹을 수가 없다.

 

낮이 되가면서 기온이 상승했다. 나가도 좋다는 암시같아 반가웠다. 기실 서울특별시를 나가 본 게 언제 였던가. 까마득하다. 나는 나갈 준비를 했다. 남해 노도 섬에서 석달 이상을 지내고 돌아온 나는 한 번은 나가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온통 부정적인 것만 나왔다. 사고, 부상, 배신, 구설, 등등에 기분이 언짢았다. 게다가 산지박山地剝은 해괴하기까지 했다. 가을철에 잘 익은 감 다 따고나서 까치밥으로 한두 개 남겨 놓는 감이 생각났다. 그 감도 언젠가는 까치든 까마귀든 달려들어 파먹으면 슬픈 박락의 때를 맞이한다. 그러나 박락은 또 다른 시작, 희망의 싹이 아닌가. 나는 나가고 싶은 마음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을 몰아갔다.

 

20분 전 15시. 낙원동 수운회관은 텅 비어 있었다. 수상자에게 보내온 화환과 잘 꾸며진? 시상식장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은 임원진 말고 S였다. 나에게 자신의 소설이 실린 1월호를 들고 오라는. 나는 작년 여름 조계사 뜰에 연꽃이 만발했을 때 나와 보고는 서울 나들이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S의 부탁도 있고 겸사겸사 외출을 감행한 것이다.

 

하나 둘 이사님들이 자리를 메우자 곧 이사회가 열렸다. 열띤 질의도 이어지고 반대 의견도 나왔다. 아는 이들이 와서 악수를 청하고 코로나 발생 이후 너무나 오랜 만이어서 이름을 잊어먹을 번한, 늘 반가운 대전의 ㅊ 이사가 달려와 주먹악수로 반가움을 표했다. 코로나19 중에도 건강한 모습들이 더없이 감사했다. 묵묵히 오가는 말들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는 돌아갈 걱정을 했다. 얼음이 다 녹았을까. 미끄럽지는 않을까. 

 

총회마치고 시상식은 수상자 가족만 모여서 간단히 치른다고 했다. 우리는 1번 아귀찜으로 몰려갔다. 낙원동 일대는 원조 아귀찜을 비롯 곳곳에 아귀찜 간판이 즐비하다. 코로나19에도 되는 집은 된다더니 바로 이런 집이었다. 밀려드는 손님들 속에 우리 일행도 자리를 잡고 아귀찜을 시켰다. 피할 수 없는 외출로 망설였으나  집 밖에서 저녁식사까지 해결하는 날이 되었다.

 

식욕은 안 나도 무엇이든 위장을 채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맥주와 소주가 나오고 술꾼들이 호탕하게 지껄이기 시작하면서 매콤한 아귀찜이 상 가운데 놓여졌다. 술이 들어가자 식욕도 느는 듯 계속 파전이요, 해물찜이요, 주문이 쇄도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얼굴이 두툼하니 살이 붙어 있고 배가 나온 모습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살아야지 어떻게 코로나19 무서워 밤낮 집에만 있을 수가 있을까. 모처럼 만나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는 그들이 행복해 보였다. 

 

아귀찜 몇 점 먹고나자 나는 일어나려고 앞에 앉은 K와 눈을 맞춘다. 우리는 집이 멀다는 핑계로 제일 먼저 아귀찜 골목을 나왔다.  K와 나는 종로 3가로 함께 걸어가서 헤어졌다. 피할 수도 있는 외출이었지만 너무 오랜 동안 두문불출한 셈이어서 서울 구경 삼아 나갔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퇴근 인파로 지하철이 빽빽했다. 어쨋든 집밖으로 나온 것은 잘 한 일 같았다. 몸을 움직인 날은 잠도 잘 오지 않던가. 피할 수없는 외출이 기쁨으로 막을 내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