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언덕까지
밤잠을 비교적 잘잤다. 꿈도 없고 중간에 깨어나지도 않았다. 그만큼 나는 지쳐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제는 많이 고달펐다. 노도 섬에서의 생활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날, 서너달 동안 벌여놓은 좌판을 거두는 일이었다. 자질구레한 물건부터 무엇이 왜 그리 필요한 게 많았던지 짐 싸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우체국 소포상자 5호에서 4호, 2호 박스 7개나 싸느라고 이미 아파있는 손가락부터 손목, 팔, 목, 등허리, 어깨, 무릎 어느 한 군데 비명지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다음에 또 어느 집필실을 가게 되더라도 섬생활은 짐이 많아서 나에게 힘들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아침밥은 전혀 맛이 없다. 세상에 이렇게 맛없기는 또 무슨 일인가. 그러나 오늘의 계획을 성취시키려면 밥은 필수다. 나는 억지로 몇 술 떠먹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밥 대신 찐 감자 두어쪽을 먹고 집을 나섰다. 그리움의 언덕이 보고 싶었다.
지난 해 봄에 일차 답사 왔을 때, 배 시간이 급해서 허둥대다가 대강 훑어 봤으므로 오늘은 제대로 보고자 했다. 돌계단이 수백이 넘는 김만중 허묘도 올라가서 작별인사를 드려야 겠다. 서포 선생은 어머니 윤 부인의 부고를 듣고 가무라쳤다가 오랜만에 깨어났다. 본래도 허약한 몸 보살피지 못한 채, 생명의 진액을 짜내어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구운몽, 선비졍경부인행장을 집필하시고 돌아가셨다. 유배 온 어떤 분이 하도 딱해서 염을 하여 노도 산에 임시로 산소를 지었다는 그 장소, 몇 개월을 거기 머물다 다른 곳으로 옮겨가신 후 그 주변에 풀이 나지 않는다는 사연이 깃든, 그곳을 반드시 올라가 직별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서포 선생이 손수 팠다는 우물도 들여다 보아야 한다. 동백나무 숲 아래 파놓은 그 우물, 물맛이 달아 섬사람들이 물을 길러 왔다고 했다. 물을 길으러 오면 서포 선생이 하염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마냥 서 있었다고 전한다. 얼마나 그리우면 마냥 서 있었을까. 동백나무 숲그늘 그 우물에는 아직도 물이 고여 있다. 어느 때는 그 우물에 도둑게가 소복하게 들어앉아 있기도 한다고 했다. 왜 도둑게냐 하면 옛날에 어머니들이 밥을 해놓으면 게 이 녀석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부뚜막에서 밥을 훔쳐 먹었다 해서 이름을 도둑게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일반 다른 게 하고는 색깔부터 달랐다. 얼핏 보면 나무토막 같은 몸통에 양갈래로 뻗은 다리를 움직이면서 부뚜막을 한달음에 기어올라, 밥뚜껑쯤은 숨도 안쉬고 열어제끼고 사람이 먹을 밥을 훔쳐먹고 줄행랑을 쳤다나! 서포 선생께서 그 초막에 계실때에도 필경 도둑게가 나타났을 터이다.
서포 문학관에 도착했다. 언제나 고요히 역사 공부에 전념하는 해설사 손 선생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나에게 주었다. 그는 오늘 관광객 한두 팀이 다녀갔다고 했다. 날씨가 푸근하면 내일 일요일에도 가족을 동반한 관광객, 등산객 방문이 있을 것이었다. 내가 그리움의 언덕에 올라간다고 하자 손 선생이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나는 마침 잘 되었다하고 구운몽원으로 가서 양소유의 첫 애인, 부채에 사랑의 시를 쓴 진채봉을 먼저 만났다. 낮잠을 자다가 청아한 음성으로 양류사를 읊는 양소유한테 반해서 즉시로 유모편에 양소유에게 구애하는 서신을 보낸 대담한 여성이었다. 계섬월 가춘운 정경패 등, 재색 겸비의 8선녀 마을을 대강 지나고, 연못을 건너 사씨남정기원을 살펴본 다음 오늘의 목적지 그리움의 언덕까지, 마침내 가장 높은 정자에 올랐다. 사면 팔방의 경치가 일품이었다.
경치만 좋으면 뭐하냐? 오히려 좋은 경치가 서포 선생으로 하여금 한양에서 천리나 먼 남해 벽지, 노도 섬에 갇힌 울화와 분노를 더욱 촉발하지 않았을까. 보이느니 오직 바닷물! 300여년 전 서포 선생이 밤낮없이 바라보았을 앵강만 바다가 짙푸르게 끝간 데 없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그리움의 언덕은 노도 섬의 최정상이다. 그곳에 올라온 게 나름 뜻 깊었다. 나는 머리숙여 많은 명저를 남기고 떠나가신 서포 선생의 명복을 기원했다. 손 선생이 알고 있는 서포 선생의 또다른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움의 언덕' 답사는 참으로 보람있다고 여겼다. 자상하고 친절한 해설, 손 선생의 진지한 화법에도 매료되었다.
몸이 힘들다고 주저앉을 뻔한 오늘, 나는 시간을 알차게 보냈고 날씨 또한 춥지도 덥지도 않고 상쾌했다. 끊임없이 배우고자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가 열리고 기회가 찾아온다. 좋은 날,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