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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 일기 36 짐을 싸다

능엄주 2022. 1. 6. 11:45

노도 일기 36  짐을 싸다

 

오늘은 아침 부터 짐을 쌌다. 어제 그제 한두 개 싸놓았지만 오늘은 마지막으로 정리 차원이었다. 내가 무릎과 팔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캐리어 하나쯤은 끌고 갈 수 있었다. 끌고 가는 게 포장하는 것보다 편리할 때도 있다. 

가방에 차곡차곡 물건의 경중. 부피, 모양을 가려 요령있게 넣는 게 글쎄, 여행을 자주 다닌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그 가방을 다시 박스에 넣고 테잎을 붙이는데 손에 쩍쩍 들러 붙는 것도 골치다. 도착한 택배를  푸는 건 쉬운 일인가.  포개지고 접혀진 물건 가즈런히 펴서 제자리 찾아놓는 일도 일은 일이다.

 

우체국 5호 박스 1개를 펼쳐 가방을 그 안에 넣은 다음 다른 한개를 꼭 맞춰서 덮어씌우고 테잎을 붙이는 작업이 끝났다. 왼손이 불편하다고 호소를 하므로 왼손 도움을 절대적으로 받아야 하는 오른 손이 훨씬 힘들어했다. 오늘은 짐싸기 마지막날, 짐을 싸고 부서진 박스를 테잎으로 기워 붙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기왕 몸을 움직였으니 내 손이 서너달 동안 닿았던 이 집의 싱크대, 선반, 배수구를 청소했다. 침실과 거실을 쓸고 닦고,  욕실 타일을 솔로 문질러 닦았다. 책상의 잡다한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그만 오전이 후딱 가버렸다.

 

 그나마 택배를 하므로 먼거리를 가볍게 여행할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다. 더구나 우체국 택배는 서비스 만점이다. 수신과 발신 모두 문자로 시간을 알려주고, 물건도 비교적 상하지 않게 전국 각 우체국을 통해 신속하게 배송되므로 늘 감사하게 여긴다. 

 

짐 포장을 끝내고 현관으로 끌어내는 일도 어깨뼈가 우지직 거릴 만큼 버겁다. 다른 창작실에서는 삼시 밥도 무료로 해결되고, 주말이면  기차타고 집에 가면서 불필요한 것은 가져가고,  필요한 물건은 조달하는 가운데  짐을 대폭 줄일 수가 있었다. 이곳에 처음 올 때 두어 차례 정도 치과 점검도 하고 옷도 계절에 맞게 두터운 것으로  바꾸러 집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 멀기도하고 배타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단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다. 겨울 내복이나 패딩코트를  준비하지 않아 추운 날 곤란을 겪는다. 여기서 새로 사 입을 수도 있겠지만  한 번 출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므로 아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일단 쓰기 작업을 종료하고 나니 갑자기 방향감각을 잃은 것처럼 멍하다. 글을 지을 때는 시간이 어떻게나 빨리 핑핑 도망치는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 작업을 놓아버리자 갈피 못 잡는 마음 붙잡으러 다니기가 어렵게 되었다. 일을 할 때가 행복하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가. 

 

나는 오후에 쉬고 싶어하는 육신의 요구를 거스리고 며칠전 갓 담은 김장김치를 나에게 주신 경로당 할머니에게 갔다. 내가 그분에게 드릴 것이라고는 안동 간고등어와 차돌박이를 넣어 만든 청국장, 그리고 양발 한 켤레였다. 객지 생활 3,4개월에 나에게는 아무 것도 그럴 만한 물건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그정도의 물품을 들고 저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이 위험하다. 핸드폰 들여다보면서 가다가 낭떨어지로 떨어질 만한 길이다. 계속 이어지는 비탈길도 겁이 난다. 이곳에 수십 년을 살고 계시는 그분들이 존경스럽다할까. 곳곳에 위험이 널려있다.

 

바다가 없는 지방에서 성장한 나는 처음와서는 날마다 감격했다. 노을 지는 시간에  우루루  몰려나가 동영상을 찍거나 폰으로 시시로 변하는 노을을 연속 찍어댔다. 그런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제 집에 갈 걱정, 걱정이라기보다는 여기 타향에 머무는 동안 가장 편안한 장소로 가장 먼저 나의 집, 우리 동네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작업을 종료하고 나자 하루가 여삼추다. 고작 사나흘이면 영영 이곳 노도 섬을 떠날 것인데 그 사나흘이 지나온 석달보다 아득하고 지루하다. 짐은 싸놓았으나 다른 일은 손에 걸리지 않는다. 석달 이상 뭣에 씌인듯 집중하고 몰두하느라  건강상태가 불량해진 것이 집으로 가는 길을 독촉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일은 순서가 있는 법.  내일 택배보내고 나면 한 이틀남았다. 그 새를 못 참으면 말이 안된다. 석달 이상 이 섬에서 먹고자고 글 쓰고 지내왔지 않은가. 

 

짐을 나혼자 2,3일에 걸쳐서 NO. 7개 싸놓은 것만 해도 나는 훌륭하다.  줄창 앉아 있느라고 몸이 붓고 푸석한데도 근근 처리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너무 고달퍼서 잠이 오지 않는다. 낮에 줄창 일을 했는데 잠이 안 오다니! 나는 내일 읍내 나가면 이곳 남해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D 대 박사 출신 작가를 만 나게 된다. 아! 그래서였던가. 저 많은 짐을 싸놓느라 힘들어 잠 못드는 게 아니라  내 무지를 일깨우려고 잠들지 못 한 것 같다. 그분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몇 배나 굉장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다. 나는 이제 잠을 자도 무방할 것이었다.

 

이 모든 투정이 나는 송구하고 죄스럽다고 진단한다.  서포 선생을 생각하면 내 사연은 몽땅 가소로운 것이된다. '서포의 책' 앞에는 큰 공사가 벌어져 있어 나는 그곳의 서포 선생을 뵙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내일은 구운몽원으로 올라가 보자. 그러니 이제 그만 잠을 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