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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수난 1

능엄주 2021. 11. 24. 11:21

머리카락 수난

 

머리카락 때문에 지금 나는 일대 수난을 겪고 있다. 

10월 13일 새벽에 일어나 여늬때 처럼 샤워를 하고 나서  나는 늘 하던 대로 욕실을 정리했다.

앗! 이게 뭐야? 어머머! 이럴 수가? 이거 무슨 일이지?

 

나는 경악했다. 펄쩍 뛸 만큼 놀랐다. 혹시나 배수 구멍으로 생쥐 한 마리가 기어들어와 엎드린 줄 알았다. 아니면 그 숱한 날벌레가 그들의 살기좋은 한때가 흘러갔으니 집단 투신 한 줄 알았다. 그놈들의 색깔이 늘 검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므로, 또한 처음 이곳 레시던스에 왔을 때  창문 틀, 그 틈마다  수십 수백의 날벌레가 끼어, 혹은 살아 헤엄치고 혹은 죽어 둥둥 떠있거나 죽은지 오래되어 물이끼에 찰싹 붙어버린, 아마도 그들 중 한 종류일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웬걸! 그건 내 머리에서 빠져나와 배수 구멍을 메운 새까만 머리카락  덩어리?였다. 아마도 수 백 개에 이를 것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뭉턱, 몽땅, 한 주먹이었다. 

 

10월 13일은 이곳에 와서 머문지 16일째 되는 날, 내 머리카락이 주먹으로 빠진 것이다. 그 시각부터 내 신경이 극도로 과민하게 변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도 문제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나날이 푹푹 빠지는 머리카락은 가을산에 솔잎 날리듯 부지기수였다. 이루 셀수도 없거니와 세는 순간에도  머리카락은 쉴 새없이 빠져 일일이 수습하기도 어려웠다. 급속한 탈모였다. 

 

여기 와서 며칠 후 나는 물에서 냄새가 나는 걸 알아챘다. 처음 와서는 나는 이곳 주민이 수돗물을 그냥 마셔도 된다고 했을 때 그 말을 100% 믿고 목이 타면 그 물을 아무 생각없이 마신 것도 여러번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빨래를 돌리면 다 빨아진 옷에 벌겋게 물이 들었고, 악취 비슷한 고약한 냄새가 남았다.  물을 끌여서 먹어도 그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곳 문학관을 관리 담당하는 분에게 물 이야기를 했다.

"물에서 냄새가 난다. 끓여서 먹어도 악취가 여전히 난다."

나는 드러나 있는 상황 그대로를 말씀 드렸다. 아무런 답이 없는 채 나는 지금 머리카락 수난에 처해진 것이다.  

 

나는 머리가 푹푹 쏟아지듯 빠지는데도 불구하고 날이면 날마다 작업에 매진했다. 어서 빨리 소설 3권을 다 쓰고 집으로 가자. 오로지 그 생각만 했다. 이 외딴 섬, 먼 곳까지 글을  쓰러와서 중간에 집에 가게 되면  다시는 이 소설을 손에  잡기 어려울 것이었다. 기왕 계획한 것이니 지금 두 권째 쓰고 있으므로 초고 3권은 써야 집에 갈 명분이 선다. 나는 더욱 작업에 속도를 가해 밀어부쳤다.

 

11월 17일. 갑자기 밖인지, 어디선지 뭐가 박살나는 듯,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막 부서지고 깨지는가 싶었으나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한다. 쓰던 글 손 놓으면 까맣게 잊어먹는다.  문맥이 흐트러진다. 쓰던 글을 마저 끝내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 현관문을 열고 한 참 서 있었으나 바깥은 고요했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 

 

어머나!  거기 그곳에 어머나! 가 벌어져 있었다. 핏물 같은 게 변기를 넘쳐나와 욕실 바닥에 벌겋게 펼쳐져 있었다. 기겁할 일이었다  '폴리스 라인'이 생각 날 정도로 그 색깔은 검붉고  흉칙했다. 어쩌면  처음 초경을 겪는 어린 소녀가 실수하여 질질 흘린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나는 멋도 모르고 변기물을 우선 흘려보냈다. 그런 다음 관리담담자에게 바닥에 펼쳐진 그 벌건 핏물같은 것을 사진 찍어 보냈다. 그가 달려왔다.

오늘 수도관 청소를 했다는 것 같았다.  아파트 수도관 청소하는 날, 이렇듯 진한 핏빛 물이 쏟아진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그저 붉으스럼한 물이었다.  5분 정도 틀어놓으면 아무 일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오늘의 이건 너무 진하고 독한 물질이었다. 지난 9월 28일 이곳에 도착해서 50여일 동안 이 시뻘건 물과 우리가 사용하고, 마셨던 물은 어떤 관계란 말인가. 혹 독극물을 마신 건 아닐까. 나는 아찔했다. 

 

우리는 그때부터 저 위 서포문학관으로 올라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나는 3호 작가로부터 물 지원을 받고 있어 미안하기 짝이없다.  맨 몸으로 걷기도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고 내리고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글 쓰기를 좀 미루더라도 더 미련을 떨지 말고 병원에 가보기로 작정했다.  마리가 뭉턱! 빠지는 이유가 이 녹물하고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우려해서 였다. 珉이가 알려준 상주 내과병원에는 전화로 예약을 해 놓았다. 시뻘건 물을 본 후 나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11월 19일. 수도관 청소하고 3일째 되는 날이었다. 14시 30분 배로 수질 검사하는 분들이 노도 섬에 온다는 것이다. 하필 창작실 중간인  2호실 내 집에서 수질검사가 진행되어 병원가는 시간이 촉박했다. 자칫하면 소설작품을 완성하는 동안 내 머리칼이  완전 희생, 대머리 박사가 탄생할 지경이 될 듯 싶었다. 일이 더 심각해질지 몰라 병원에 가기로 한 것은 숙고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수질검사가 더디게 진행되자 조바심이 났다. 

 

珉이가 노도 섬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검색해서 보내주어 다행이었다. 나는  막 뛰어가다싶이  겨우 15시 30분 배를 탔다. 벽련항에 내려  콜택시를 타고 진료마감 시간 전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접수를 마치자 조금 기다리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몹시 초조했다. 

 

문진 - 나는 내가 느낀 대로, 경험한 대로 내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세수할 때도 얼글 피부가 따겁고 쓰라린 것도 말했다. 박xx 그는 양심있는 닥터인가. 가자마자 환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검사부터 하자는 우리 동네 대형 병원과는 많이 달랐다. 약처방도, 혈액검사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내가 지켜야 할 행동지침, 주의사항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이제부터는 '서포문학관 물을 먹을 것, 샤워도 다른 데 가서 할 것. 그렇게 실천해보고 나서 다시 병원에 올 것' 등이었다. '노도 섬은 진주에서 물을 바다 밑으로 끌어왔는데 서포 문학관은 직통이라 오염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작가들이  머물고 있는 레시던스는 수도관이 여러 곳을 경유하고. 또한 사용하지 않고 오래 비워둔 집이므로 오염될 수 있다'는 닥터의 설명이었다. 닥터가 10월에 노도섬을 다녀갔다고 했다. 그는 노도 섬의 물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 시름 놓긴 했다. 그러나 한 순간도 머리 빠지는 건 중단되지 않아 걱정을 안은 채 콜택시로 벽련항에 와서 17시 30분 마지막 배를 탔다. 

어디 다른 데가서 샤워를 한단 말인가. 서포 문학관 직원은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내 이야기에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11월 24일,  하는 수 없이 물이 염려스러워도 미루던 샤워를 했다. 무엇보다  머리가 찝찝하고 엉겨붙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빠진 머리카락이 시커멓게 배수구멍을 막았다. 나는 그것을 사진 찍었다. 전번보다 아주 쪼끔 덜 빠진 것 같았다. 그러나 묵과할 수 없는 많은 분량이었다.

3호의 선량한 젊은 작가가 내가 사용할 물을 길어다주면서 더 많은 물병을 달라고 했다.  내 머리를 그가 길어주는 물로 행구라고 했다.  하지만 그 물의  분량은 패트병 몇 개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고맙고 또 미안하기도 했다.

 

이게 머리카락 소동, 수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백질 부족도 아니고, 글 쓰는 스트레스도 아닌 것 같다. 집에서도 늘 이 정도의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살았다. 내 머리카락은 수질이 극히  불량해서 빠지는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탈모! 제발 이제 그만 스톱! 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나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딸은 말힌다.

"엄마는 지금 서포선생을 겪는 것이라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견뎌내야 한다고."

그 말이 나는 무정하게 들린다. 견딜 것을 견뎌야지. 건드리지 않아도 부스러지고  수도 없이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아침마다 머리카락 주으랴 날벌레 처치하랴 분주하다.  날씨가 서늘해졌는데도 쬐끄만 날파리가 사람을 물어 뜯는다.

 

세상에 꽁지빠진 새가 지금 내 머리꼴이 아니겠는가. 을가을 내 머리카락이 서포 선생이 풍토병에 걸려 갖은 고초를 겪으며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 만필을 쓰고 돌아가신 노도 섬에서 왕창 고장나다니. 그러지 않아도 섬 생활에 불편이 가지가지인데. 이곳 사정을 모르는 딸은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한다.

 

머라카락 수난으로 말미암아 외모의 변형은 외출을 기피할 정도다.  이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을까. 몸과 마음, 영혼이 편안해야 글도 터져 나오거늘. 머리카락이 점점 빠질 수록 나는  기운이 다운되는 것을 느낀다. 마음까지 위축된다.  이 즈음에 나는 문득 '삼손과 데릴라'가 생각난다.  머리가 없으면 기운이 없게 된다는  삼손의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