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회상
참으로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다섯 살이었던가, 여섯 살이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때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마도 연년생인 나 다음 동생보다, 또 그다음 동생보다 더 어린 젖먹이 동생인 듯하다. 아기는 울거나 보채지 않고 어머니의 품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 오른쪽엔 내가 앉아 있었고, 왼쪽에는 학교에서 일찍 퇴근한 막내이모가 앉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장소는 청주극장이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좌석은 비교적 앞자리에 속한 것으로 유추된다. 극장 안은 캄캄했다. 아무도 떠들거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 무대에 펼쳐지는 연극(혹은 영화-활동사진)을 보면서 변사가 연극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른 것은 돌아볼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저런 풍경을 지금 이렇게나마 술회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낮 시간이 아닌 밤 시간에 다른 애들을 집에 놔두고, 갓난아기를 안고서까지 극장 나들이를 감행한 것이 어린 나에게는 기이한 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기를 데리고 극장에 와야 하는 긴박한 요인이 있었는지 그것 역시 알 수 없다. 내 위로는 언니와 두 오라비가 있었는데 어째서 그들을 제쳐두고 나를 데리고 갔는지도 지금껏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극장 안은 조금 습하고 서늘했다. 어머니와 막내이모는 그에 대하여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늘 잔병치레가 잦은 나 혼자서 서늘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나는 추워 몸을 움츠리고 있다가 소르르 잠이 들기도 한 것 같은데 갑자기 큰 비명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것은 한 사내의 목에서 흰 피가 쏟아져 공중으로 솟구치는 장면이었다. 피라고 하면 누구나 새빨간 피, 검붉은 피를 연상하게 되는데 후줄근한 한복을 입은 그 사내, 즉 이차돈(異次頓)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는 희미한 조명으로도, 졸음이 덜 깬 나의 눈에도 하얀 피가 분명했다.
주변은 극심한 긴장감으로 얼어붙었다. 일체의 소리와 기척이 모조리 정지된 채 경악과 당혹감만이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곧 연극은 막을 내렸다. 하얀 피가 흘러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공포와 불안감에 휩싸여 허둥지둥 극장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황급히 아기를 업었고 막내이모는 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날 밤 〈이차돈의 사(死)〉를 본 것이 나로서는 불교와 접한 최초의 구체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따라 청주 용화사에 자주 갔다. 일제 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대처승이 되신 외할아버지께서 계시던 곳이라고 했다. 용화사는 벚나무가 열을 지어 선 무심천 둑길을 십여 리 걸어가면 까치내 못미처 평지에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절이었다. 대웅전 한옆에 작은 연못도 있었던가.
아버지는 모시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고서 우리에게 부처님께 절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아버지가 절을 할 때마다 모시 두루마기가 스각스각, 별스런 음향을 자아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집안 살림과 고만고만한 동생들 시중들기 바빠서 절에 갈 겨를이 없었던지 용화사 갈 때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였다.
우리는 스님의 염불을 알아들은 것도 아니고, 법당 안에 모신 부처님, 신중, 탱화의 의미를 절대로 알 수 없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늘 출장 중이시던 아버지와 함께인 게 즐거웠고, 서로 경쟁하듯 무릎이 삐꺽거리도록 거푸 절하는 것이 그냥 좋았다. 더 신 나는 것은 법회가 끝난 다음 둘러앉아서 먹던 절밥이었다. 요즘의 유기농 채소 맛에 비할 바 없이 각종 나물의 참맛이라니! 다소 비관적인 예측이지만 그때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먹던 나물은 어디서고 다시 먹을 기회가 주어질 것 같지 않다.
여고 시절 각종 특기, 이를테면 운동, 미술, 음악, 문예 등등에 재능 있는 선후배의 모임이 있는 날 우리는 사진촬영을 하기 위해 무심천 둑길을 걸어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용화사로 가곤 했다. 불교 신자가 됐건 아니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용화사에 거의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마치 외갓집에 온 것처럼 앞장서서 절 마당을 뛰어다니곤 했다.
그리고 충북과 충남의 어중간한 곳에 있는 안심사며, 서울 K 대학 옆의 연화사, 또 괴산 연풍의 〇〇암, 법주사 등, 외가 친척들과 함께 외할아버지가 그렸다는 불화, 탱화를 찾아서 절 출입을 많이 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자취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6·25 때 일찍 돌아가신 외삼촌 대신 외사촌 오라버니가 무수히 고생했지만 단 몇 점의 불화만 확인했다고 하던가.
특별히 무슨 재일이 아니더라도 느닷없이 절에 가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러면 나는 얼마 동안 그 동네에 머물러 산 적도 있는 연화사로 간다. 유감스럽게도 절은 옛 모습이 아니다. 아예 생소하다. K 대학의 시멘트 건물이 절 담장에 바싹 붙어 있어 절의 공간-여백의 미가 깡그리 소멸한 점이 애석했다. 외형만 변한 게 아니었다. 법당에 들어가 참배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른 건 다 변해도 절집만은 옛 그대로가 좋은 게 아닐까 생각하며 쓸쓸히 절 문을 나오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가는 것을 쉬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출처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