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나무 회잇팅
오전에 비가 내렸다. 오랜 만에 내린 가을비였다.
내가 머물고 있는 레시던스 동쪽, 현관문에서 정면에 보이는 숲은 자생 동백나무가 거의 주종을 이룬 것 같다. 수 백 년의 나이테를 가늠할 만큼 제법 둥치가 큰 것들이 많다. 그 크고 우람한 동백나무는 칡 넝쿨이 밑동에서부터 거의 나무꼭지까지 칭칭 감아올라가 그게 동백나무인지 칡넝쿨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오후에 비가 개이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나는 머리를 식힐겸 패딩 코트에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집밖으로 나갔다. 걷기 위해서였다. 집안에서도 걷기 연습은 가능했지만 나는 찬바람을 쐬고 싶었다. 사색당쟁이 극심하던 이조 시대의 세상돌아가는 꼴새를 살피다보니 머리에 뜨근뜨근 열이 났다. 오래 앉아 있어 다리도 퉁퉁 붓는다. 그 다리를 풀어주지 않고 그대로 잠자리에 들면 밤에 잠자다가 고통을 당한다.
잠이 깨서 손으로 다리를 주므르거나, 주먹으로 두들겨도 보고, 더운 물에 담그기도 하는 등, 나는 잠이 확 달아날 정도로 노력을 해야 한다.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괜히 단잠만 손해보고 다리는 여전히 퉁퉁 부어서 옴싹하기도 힘이 든다. 옴싹보다도 못 견딜 것은 통증이었다. 종아리가 터지는 것 같다. 날이 새면 첫배를 타고 정형외과를 찾아가보자. 정형외과에서 해결할 수 있는 통증인가, 나는 한 밤중 잠 못자고 걱정을 해야 한다.
그래서 바람이 바다를 울리고, 숲을 흔들고 사정없이 창문을 두들겨도 나는 부은 다리를 풀어주기 위해 밖으로 나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문을 나서자마자 내 눈에는 칡넝쿨 일년생 乙木이 다년생 甲木 동백나무를 해치는 것으로 보였다. 동백나무인지 칡넝쿨인지 분간이 안된다는 것은 다년생인 갑목 계열 동백나무가 칡넝쿨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였다. 왜 저혼자 못 살고 다른 나무를 괴롭혀? 칡넝쿨이 동백나무로 가는 햇볕을 차단한 것이다. 또한 통풍을 방해하는 것이다. 생장 조건을 마비시키는것이다. 마지막에는 칡넝쿨이 큰 나무를 고사시킨다.
그러므로 심한 바람은 갑목인 동백나무에게 구원의 신호일 수가 있다. 바람결이 거세고 활발할 수록 동백나무는 몸부림을 친다. 칡넝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힘껏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비가 힘차게 폭우로 퍼붓고 바람이 휘몰아칠 때 동백나무는 숨통이 트이는 것이니까. 동백나무는 바람의 지원을 받아 둥치를 마구 비틀어 흔들고 또 흔들어야 산다. 강력하게 흔드는 동작을 반복하므로 을목에게서 유리될 확률이 높을수 있다. 칡넝쿨이 위에서부터 슬 슬 풀어져 허공에서 나붓낀다. 그만해도 동백나무는 조금 숨을 쉴 수가 있을 터. 나무 둥치가 더러 꺾이거나 비틀려도 갑목은 살아남기 위해 흔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해가 지면서 바람 소리가 더욱 맹렬해진다. 거친 바람소리는 갑목과 을목의 생사를 가르는 전투가 벌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오늘 저녁처럼 바람결이 흉흉한 날, 갑목은 회생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내일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빛을 훔뻑 더 많이 받으려면 온 몸을 칭칭 감은 을목을 떨쳐내고서야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있는것 아닌가. 나는 동백나무가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칡넝쿨을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눈여겨 보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도 이와 같은 전투는 너무나도 흔한 게 아닐까. 예를 들면 간신이 충신을 모함하여 중앙에서 천리나 먼 변방으로 몰아내는 일 같은 것, 소인이 군자, 대인을 대적하여 무참하게 박살내는 일 따위를 상상해 볼 수가 있다. 서로 상생 상보는 영원히 불가능한가.
산에서 수백년의 수령을 자랑할 만한 나무들이 말라죽은 형상을 자주 만난다. 죽은 나무를 보며 그 나무의 운명인가, 수명이 그것밖에 안되는 나무일까. 상상을 해본다. 乙木에 몸통 전부가 감겨서 말라 죽었거나 순조로운 자연사는 아니 것 같아서다.
바람이 분다. 밤이 되니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나는 동백나무를 위하는 마음으로 외친다. 동백나무 加油! 화잇팅!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