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느껴운 구운몽원의 밤
야밤에 구운몽원에 가본 일 없으면서 겁부터 냈다. 낮에도 혼자서는 무서워 오르지 못했다. 이곳 날씨가 11월에도 이처럼 포근하니 밤이라해도 뱀이 출몰할까. 숲속에서 고라니가 불쑥 튀어나올까. 공기 좋고 물좋은 이곳에 호랑이처럼 등치가 큰 고양이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을까.
외딴 섬 여기는 고양이 천국이라 할 정도로 집집마다 고양이 가족 몇 마리는 보통이었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 풀숲과 나무 그늘, 건물 뒤안이나 큰 길가에도 고양이가 몇 마리씩 떼를지어 몰려다니고 있다. 낮에는 그 고양이들이 귀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지만 밤에 보는 고양이는 유독 그 눈이 매서웠다.
낮에 머리칼이 심히 빠지는 때문에 우왕좌왕하느라고 노트북을 열지 못했다. 토요일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면 미용실 도움을 받아야 할 머리였고. 굳이 머리를 손질하지 않고서도 마음으로는 가능했지만 나에게 무수한 갈등이 일어났다. 입주 신청서에 명시한대로 입주작가에게 부과된 책무? 의무? 사항이었다. 행사 참여라는 그 규정을 어겨서는 안 될 것 같아서다.
혼란스러웠다. 이곳에 머물러 작업을 시작한지 한달 여. 그 한 달에서 2주는 제외시켜야한다. 2주 동안 할일은 거의 신축건물인 레시던스 대청소, 비품 구비, 생필품 조달 등으로 어수선했다. 작업을 했다고 하면 고작 20일 남짓이었다. 현재 별 진전이 없다. 하루 5~6 시간 몰두 한다고 해도 200자 원고지 7,80매 쓰기도 벅찼다. 쓴다고 다 문장인가. 고치고 또 고치면서 얼추 스토리 연결은 순조로워야 한다.
가장 번거로운 것은 세끼니 식사 해결이었다. 끼니마다 무얼 먹을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집에서 준비해온 것은 고작 장아찌 종류뿐이었다. 한 식구나 두세 식구나 밥하는 수고는 동일하다.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하고 이 닦기가 매번 시간을 잡아먹었다. 제대로 된 몰입, 몰두, 삼매지경을 경험해 볼 수 없는 나날이었다. 매수는 불지 않고 제자리 걸음이었다. 나는 불참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입주 기간 내에 열심히 작업해도 내 계획대로 끝 낼 수 없다는 염려로, 먹고자는 시간도 아깝고, 마음이 바쁘다고 말했다.
나는 지난 밤 무엇엔가 홀려서 25시에 잠이 깼다. 얼마나 걱정이 되면 한 밤중에 꿈도 없이 잠을 깨는가. 나는 일어나 불을 켠 다음 책을 읽었다. 내가 쓰는 소설 작품에 이만한 자료가 없다 할 정도로 나에게 유익하고 수승한 책이었다. 구운몽의 저작 장소를 전에 공부한바 대로 평안도 선천에서 남해 노도로 이적하는데 더없이 유용한 자료였다.
그렇게 책을 읽으며 아침을 맞이했고 낮에는 본 작업에 시간을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저녁에는 다른 날보다 일찍 밥을 먹었다. 밥먹기도 일 중에 일이었다. 위장도 비어있는 상태였다. 저녁시간 한 때라도 일같은 일 좀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
"노을을 보러 나오세요!"
1호실 시인이었다. 시인은 소설가보다 문예文藝노동이 가벼운 때문인지 매일 저녁 노을을 감상한다. 노을뿐인가. 밤바다도 즐기는 것 같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어제의 노을이 다르고 오늘의 노을이 달랐다. 자연의 신비와 오묘함을 체험해보는 시간이었다.
300~400여 년 전 서포 선생도 앵강만, 노도 섬의 노을을 사랑했을까. 당시 서포의 심경을 떠올려 보는 게 이곳에 온후 부터 습관처럼 굳어 있었다. 그 심정이 어땠을까. 높은 벼슬자리, 존경하는 모친 윤 부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나는 그런 마음으로 붉게 타는 서녘하늘을 바라보았다.
"다 같이 구운몽원에 올라가요! "
전화 한 S시인이 또 말했다. 나는 쾌히 답하고 점퍼를 걸치고 행여 장을 자던 뱀이 놀라 기어나올까 싶어서 3호 실 작가가 마련해준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바다도 잠들고 바람도 없는 고요한 산길이 펼쳐졌다. 혼자 걷기에는 멀고 아득한 길이었다. 이방인 끼리는 아무래도 허전할 것 같아 동행한 이곳에 거주하는 관리소장님 등, 몇몇이 함께 하니 멀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음력 9월 그믐밤, 그야말로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지만 외등이 곳곳에 있어 길은 밝았다.
구운몽원으로 가까이 올라갈수록 일찍 나온 별들이 구운몽원 먼 산 위에서 옛이야기를 속삭여 주듯 반짝 거렸다. 하늘에 별무리가 넓게 상서롭개 펼쳐 있어, 바람도 잠든 구운몽원 일대는 깊은 적요가 흘렀다. 더없이 고요하고 별빛 느껴운 구운몽원의 밤이었다.
양소유의 첫 여인 진채봉 동상이 별빛아래 아련히 보였다. 시어가 분출할 것 같은 낭만적인 밤. 철 안 난 문인들의 밤이 구운몽원의 슬픈 역사를 품고 있는 듯 했다. 저 반짝이는 별들을, 저 아래 앵강만 바다를, 수백 년은 넘었을 동백나무, 겨울철에도 시들지 않을 억새와 갈꽃들을 서포 선생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그 애틋한 심사를 헤아리며 가파로운 비탈길을 올라 연못의 돌다리를 겅중겅중 뛰어넘어 정자에 앉았다.
왜 서포 선생만 생각하면 코허리가 시큰해지는가. 왜 눈물이 폭발하려고 하는가. 왜 가슴이 조이도록 설움이 북바치는가. 그게 언제 적 사건인데. 싶으면서도 나에게는 현재진행형 애상哀傷이고 눈앞의 진실이었다. 달빛 없는 밤의 적요는 깊은 숲속에서 생전에 억울함을 겪은 정령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듯 조금 무서웠다.
밤이 깊어갈수록 별 무리가 영롱한 빛을 뿜었다. 드문드문 켜진 외등과 함께 구운몽원의 밤 풍경은 은밀하고 고즈넉했다. 별이 빛나는 밤을 읊졸여도 좋은 분위기였다. 서포 선생께서 계실 당시에는 별빛이 초롱초롱 더욱 빛났으리라. 별들이 서포 선생에게 말을 걸었을까. 바람도 구름도 한양 선비를 모른 척 지나치지는 않았을 터. 숲속의 고라니와 노루도, 산토끼, 다람쥐, 청설모도 서포 선생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속절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두 발을 부르르 떨며 지켜보았으리라. 별빛 느껴운 가을 밤. 구운몽원은 우리에게 그때 그 시절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죽음 같은 적요와 살을 찢는 고독으로 구운몽, 사씨남정기가 탄생했노라고. 저 하늘의 뭇별들은 서포 선생의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기막힌 사연을 알고 있다고. 수근대는 것 같았다. 사오 백년 쯤의 나이테를 자랑하는 동백나무 군락에서 나무마다 그네들의 샛빨간 핏빛 정념을 끌어안고, 서포 선생의 설움을 위로하는 듯 때 아닌 동백꽃이 한둘 피어나고 있었다.
서포 선생은 가고 없어도 그 때 그 시절을 기억하는 바다 갈매기 후손들이 저무도록 앵강만 바다 위를 넘나들고, 노도 마을의 노쇠한 후박나무는 서포 선생의 발자국 소리를 기억하는듯, 바닷바람에 그 큰 나무 둥치가 마구 흔들 때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하염없이 후박나무를 우러르곤 했지 않은가.
별빛 느껴운 구운몽의 밤. 우리는 뭇별들이 광활하게 펼쳐진 투명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각자가 지닌 서포의 기억을, 서포선생의 300년 못다 푼 고독을 보듬고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