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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

능엄주 2021. 10. 11. 11:34

좌정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본다. 섬에 오기도 처음인데다,  드물게 보는 비오는 날의 아우성치는 바다 풍경이었다. 바다가 쉬지 않고 으르렁 거렸다. 무슨 짐승이 우는 소리 같기도. 바다 갈매기가 놀라 도망칠 만큼 큰 소리로 쉬지않고 울부짖는다. 대체 으르렁, 이 소리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바다 깊은 곳에 용궁이 있는가. 뭇 용들이 비를 내리게 하고 환호하는 기척일까.

 

바람 소리도 매우 강하다. 어찌나 거칠고 드센지 노도 섬의 수십 수백의 동백나무 가지가 휘청! 꺾어질 것만 같다.  실내에 있어도 바다가 뿜어내는 큰 소리.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가 뭍에서 살다 온  중생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해질녘에 사정없이 퍼붓는 폭우 때문이었다. 

 

어린 날 대청호 호수(그때는금강 지류)가 꽝꽝 얼었을 때, 언니와 둘이서 그 얼음 호수를 건너 덕골 산마을에 간 적이 있다. 언니는 가방을 등에 걸머지고 씽씽 미끄럼을 타면서 강을 건너갔다. 나는 그때 기이한 소리를 들었던가? 호수가 우는 소리, 호수가 숨쉬는 소리, 어쩌면 새봄의 소식을 전하는 소리였을지도 모르는 그 소리에 놀라 내 귀는 호수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먼저 호수를 건너간 언니가 반대편에서 나에게 손짓했다. 어서 건너오라고.

 

몸을 돌이켜 보니 호수 반대쪽은 거리가 아득히 멀어보였다.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호수의 얼음이 쩍 쩍 갈리지는 소리였을까. 우직끈? 어쨋든 아름다운 음률과는 거리가 있는 그 소리, 호수 밑에서 하늘에 오르지 못한 용이 트림을 하는가. 중 1인 나에게 공포를 품게 하는 소리였다.

 

스무살 언니가 나에게 씽. 씽. 미끄럼을 타면서 달려왔다. 언니는 미끄럼타기에 신바람이 난 것 같았다. 두 볼이 발그레 홍조를 띠었고, 행복한 미소가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언니가 내 한 쪽팔을 붙들고 다시 미끄럼을 탔다. 나는 거의 쓰러질 듯, 언니에게 의지해서 근근  얼음 호수를 건넌 기억이 새롭다.

 

얼음 호수 이야기는 우연이 아니다. 바다가 내는 괴상한 소리에 겁을 먹은 내가 문득  오래전의 두려움을 떠올린 거다. 바닷가 근처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바다의  생경한 소리를 해석할 길이 없다.

서포문학관에 무슨 새로운 자료가 있을까 보러갔다가 빌려온 책, 독서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날씨가 하도 험해 걷기운동도 못 나갔다. 종일 책상에 앉아 있다보면 종아리가 퉁퉁 붓고 아프다. 걷기운동은 내가 건강하게 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윙! 윙! 바람이 바다 세력에 질새라 산천을 찢을 듯, 부르짖는다. 바다뿐아니라 산하대지를 돌고도는 바람과, 숲속의 풀 나무들까지 각기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 소리는 노도섬을 대표하는 특징인가. 어쩌면 태동하는 새생명의 음악인가. 혹여 서포 선생의 혼이 노도 섬에 이르러 3년 여의 지옥이 서럽고 억울해서 목놓아 울고 있는가. 나 역시 고독한 남해의 성자 탄생을 위해 허위허위 낯선 이 섬을 찾아온 게 아닌가. 서포 선생이야말로 전세계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슬퍼 울 일이 남았는가. 

 

장차 동량지재가 될성부른 곧게 자란 긁은 가지는 남겨두고, 쓸모 없는 가지는 쳐주어야, 작은 나무 큰 나무가 서로  상생상보, 햇빛과 바람을 평등하게 공유하면서 잘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왜 때에 맞게 벌목을 해주지 않느냐고  사납게 불어치는 바람 갈피에서 나무 가족들이 항의하고 있는가. 숲에 사는 모든 나무 권속들이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갈등과 울분과 서러움과 희망과 소원을 노출하는 것인가.

 

바다의 울부짖음, 육지와는 판이한 거친 바람, 그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나무조차도 나는 무섭다. 이틀 동안 문밖으로는 한 발자욱도 내디뎌 볼 수가 없다. 생소한 객지여서, 더구나 배를 타지 않으면 꼼작 못하는 외딴 섬이라 더 무서운가. 

 

몰입하라! 좌정하라! 

이럴 때는 좌정이 답이라고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면의 소리가 신호이듯, 나는 3겹으로 된 모든 문을 걸어 잠그었다. 일체의 소리가 차단된다. 크고작은 산봉우리에 뒤덮인 먹구름과, 쏟아붓다시피 퍼붓는 빗줄기, 높은 파도 성난 물결, 나 살려요! 하면서 막무가내로 휘둘리는 숲속의 나무들, 현관문까지 8개나 되는 집의 문을 모두 꽁꽁 닫아놓으니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다.

 

책에다 눈을 고정시킨다.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이끌려 들어간다.  상금이 꽤 높은, 유수한 문학상 수상작이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는 결코 만나지 못한 책, 다른 책들보다 활자가 작은, 9호 포인트로 촘촘히 엮은, 읽기가 좀 힘들었어도 은밀한?재미가 있었다. 허구와 사실이 혼재, 기루를 관아보다 더 지성으로 들락거리는 부정부패 탐관오리의 방사 묘사가 못내 난삽하기도, 유식한 역사 스토리로 빠지다가 본론으로 돌아오는, 어지간히 박학다식한 작가의 작품이었다.

바깥이 몹시 소란스러워 강제로 좌정한 날, 나에게 독서는 소득이라면 큰 소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