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마음
동생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70여일. 빠른 것이 세월이라하지만 참으로 덧없고 어이가 없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손놓고 펑펑, 시간을 낭비한 기억은 없다. 나는 나대로 바쁘고 힘겨운 나날이었다.
오늘은 진통제를 먹고서라도 동생네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동생에게는 아들이 버젓이 있지만 제 엄마가 수년 동안 앓는 와중에 엄마를 보러 한 번도 한국에 다녀간 일이 없다. 전화 한 통화 없었다고 했다. 현재는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있지만 해외에 살더라도 성의, 정성의 표시는 반드시 행차를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저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공부시켜준 부모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던가. 아들의 목소리, 손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던 동생은 실망한 채 눈을 감았을 것 같다.
동생 딸은 제 엄마가 병이나자 해외에서 돌아왔다. 응급 상황이 터지면 제 엄마를 차에 태우고 큰 병원으로 수시로 달려가야 했고, 병 간호에서 시작하여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홀로 감당했다. 여전히 현역인 제 아빠의 도시락을 싸는 일도 만만치 않았고, 그애의 일은 집 안팎으로 차고 넘쳐났다.
이른 아침 나는 외출준비를 했다. 내 컨디션이 영 개이지 않아 열두번 더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내가 간다고 해서 그애의 슬픔이, 그애가 짊어진 짐이 가벼워 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아들 낳았다고 일가친척 모두가 환호했던 게 무색할 만큼 동생의 아들은 오직 제 아내, 제 아들, 처갓집이 세상의 무엇보다 최우선이었다. 모친의 병환, 생사는 안중에도 없는 아들에 비하면 그래도 딸은 자신의 몫을 잘 해냈다고 불 수 있었다.
전에 K대학에 장학금을 출연하던 나의 친구와 갔던, 거대한 식당에 나는 동생 딸과 마주 앉았다. 그곳에는 코로나19에도 손님들이 많았다. 그애는 그동안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나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할 이야기가 쌓인 것 같았다. 끝이 없이 이어졌다.
"이럴 수가 없어요! 엄마가 그처럼 원했는데 자기 마누라 무서워서 전화도 못 건다네요."
"너가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고 있어. 아들은 장가가면 데릴 사위는 그래도 좀 나은 표현이고 그집 머슴이라지 않니. 우선 밥부터 먹자!"
나는 동생 딸의 격앙된 감정을 무마시키면서 수저를 들었다. 분할 만도 하지. 어려서는 제 엄마가 아들만 선호한다고 불평했지 않은가. '나쁜 놈!' 내 입에서도 험구가 나올 태세였지만 참았다. 아픈 엄마를 염려하는 착한 마음은 잠시잠깐 일어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다. 본래부터 타고난 본성이 아닐까 싶다. 상대가 부모라면 굳이 착한 마음을 운위할 여지가 없다. 아무리 제 처가 사랑스럽고 소중하다고 하지만 동생 아들의 처신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섭섭하고 불쾌한 마음 떨쳐버리고 네 아빠랑 네 건강 잘 챙겨!"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으며 나는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무심한 갈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위무慰撫해주는 듯.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