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어느덧 9월

능엄주 2021. 9. 3. 12:43

어느덧 9월

 

갈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꽤 된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잠 깨서 일어나 나오니 바람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낮에는 여전히 햇볕이 따겁고 더웠지만 조석으로는 입추 무렵에 이미 가을이었다.

 

9월로 넘어가면서는 비도 푸짐하게 내렸고, 가을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 바람결에 나뭇잎 흔들리는 모습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늘에서는 더위를 전혀 느끼지 않게 되니 공부하고 몰두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이제 얼마 후면 나는 먼 길을 떠나게 된다. 중간에 추석이 끼어 있어 며칠 지체되었지만 떠나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은 아침밥을 일찍 먹기로 했다. 오늘부터라도 흐트러진 일상의 질서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치과 다니다가 입맛을 잃었다고 하소연하니까, 이종 사촌이  이 아플 때 잘 가려 먹어야한다면서 일러주었다. 살코기만 갈아다가 양파와 당근을 채썰어넣고 볶았다. 내 입맛이 가을바람에 살아나려는가. 그럭저럭 낯설지 않게 아침 식사를 마치자 나는 곧 아들네로 달려갈 준비를 서둘렀다.

 

알맞게 맛이 든 오이소박이. 홍고추와 사과를 갈아넣고 담근 부추김치, 내가 직접 제조한 칼칼한 고추장으로 양념한 더덕 구이, 그리고 올리브 기름으로 볶은 살코기를 포장했다. 어쩌면 아들네 집에 가는 게 올해로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서두르는지도 몰랐다. 전에는 L A 갈비, 불고기, 장조림 등, 시간과 품이 많이 걸리는 육류 일색이었다면 이번에는 내가 평소에 쉽게 만들어 먹는, 내 입맛에 맞는 것들이었다.

 

틱낫한 스님의 [화]를 읽고 난 후 고기를 멀리하려고 노력해왔다. 한참 성장기에 있는 아들의 두녀석을 위해서는 기꺼이 육류를 구입했지만, 굳이 단백질이 필요할 때는 나는 닭 가슴살로 대체했다. 온갖 세균이 창궐하는 시대에 음식 조심은 필수여서 되도록 단순하게 소박하게 식물성 식재료를 선호해 왔다.

 

이종 사촌의 충고를 듣자 바로 고기를 사러 갔고,  양념도 간단해서 후딱 만들어 싸들고 나는 4블럭을 걸어 갔다.

"아이그! 왜 이런 것 들고 다녀요? 제발 이러지 마시라니까. 우리끼리 잘 하고 있다고요."

"그래도 맛있게 먹어! 애들만 주지 말고 아들도 먹어!  나 먼 데 가게 돼서 이별의 선물이야!"

 

이번 출타는 엄두가 안 나고 걱정이 많다. 그야말로 산넘어 바다 건너 아득히 먼 곳이고 교통이 불편해서다. 오래 병원 다니느라 체력 소모가 심했고 내 기력은 여태 아슬아슬하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다른 글을 쓰면 되지, 마음 느긋하게 먹었더니, 나의 염원 그대로 결정이 난 것이다. 바야흐로 나에게 뜻 깊은 체험, 자발적 고독, 선택적 유배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9월! 나는 분발해야 하리라. 망설일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