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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적막이 걷히고

능엄주 2021. 8. 16. 01:35

코로나19의 적막이 걷히고

 

반드시 며느리 제사를 지내러 저녁에 아들 집에 가는 건 아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 요즘은 아들이 나에게 오라고도, 나 역시 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애들 역시 학교에 가지 않으니 학교 앞에 사는 나는 그애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수시로 맛있는 거 내라면서 책가방 들러메고 친구들을 몰고 우리집으로 달려오던 일이 그만 아득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가까운 곳 먼 곳 할 것 없이 어른 아이 모두 문밖에 나서기가 공포스러운 시기가 아닌가. 

 

8년 전 8월 15일이었다. 자정에서 오분 정도 모자랐을까, 2,3분이었을까. 대구 보훈병원을 나와 KTX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며느리 부음을 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나는 며느리 침상에 다가 앉아 그녀 손을 잡고 이름을 불러보았다. 나를기다렸던가. 내 음성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애들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난지 어느덧 8년! 마음 못잡던 아들이 아이들 보살피는 것이 익숙해졌고, 점차적으로 매사 잘 해내고 있다. 잘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서글프다.

 

해마다 며느리 제삿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등허리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라도 아들집으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6살 8살 어린아이들이 14살 16살 소년으로 우뚝 커버린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아들 혼자서 제삿상을 차리기 위해 직장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시장보아오고 준비하느라 힘들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식사나 하러 오세요!

아들은 나를 배려하여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삿날이 무슨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날인가. 몸이 지글지글 아프지만, 단 하루 저녁이라도 도와주면 아들이 설거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제사 의식이 끝난 다음에는 이미 다음 날로 시간이 기울어져 있어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길다면 긴 8년의 세월에 아들은 제삿상 차리는데 베테란?이 되어가고 있다. 일손이 어찌나 빠르고 손맛 또한 양호한지, 내가 간다고 해도 아들만큼 간을 잘 맞추지 못하니 별로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다만 아들이 뒷처리, 설거지를 겁내므로 그 일만이라도 도와주러 가는 것이다.

 

영정 사진을 가져와 상머리에 안치할 때는 마치 기다린 것처럼 처음이나 지금이나 눈물이 솟구친다. 내 마음이 이럴 진데 아들과 두 소년은 어떨 것인가. 외모로야 씩씩하고 늠름하게 잘 자란 것 같지만, 소년들의 마음은 오늘 같은 날 유독 더 슬플지도 모른다.  애들 엄마는 변함없이 두녀석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그래서 두 녀석이 이만큼이라도 밝고 건강하게 잘 자란 것일까. 

 

제 엄마 젯상에 절을 올리는 두 녀석을 바라본다.  8년 전 6살 8살 두 꼬마가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서  상가를 찾은 어른들에게 꾸벅! 꾸벅! 절을 올리던 광경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아들도 두 녀석도 오래 잘 견뎌냈다. 잘 참아왔다. 내년에는 코로나19도 물러가고 아들 가정에 제발이지 평화와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평화와 행복의 주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함인가. 조심스러워 감히 말하기도 어렵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밀어준다는데 나는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온 가족의 소망이므로.

 

제사 의식이 끝나 나는 작은 그릇 큰 그릇이 잔뜩 출동한 설거지, 집안 구석구석 뒷처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가 전혀 없고 차량들만 속도를 내어 달려간다. 낮에도 밤에도 거리는 무척 적막하다. 코로나19가 몰고온 이 적막은 언제까지인가. 코로나19의 적막이 걷히고,  아들 가족의 일상에도 가을 햇볕이 쨍! 하고 빛나, 우수의 그늘이 말끔히 사라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