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나는 방학을 기다렸다.
다른 해에 비해 유난히 비가 많고 그 비가 폭우라는 다소 거친 명칭을 붙여야 하는 전대미문의 험상궂은 빗줄기였으므로
그 비를 뚫고 어린 것 둘을 거느리고 서울 나들이를 감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하였다.
하긴 뭐 KTX 에 앉기만 하면 두 시간 이내에 서울역에 도착하는데 그리 큰 걱정일 것은 없었다.
방학이나 추석과 설 명절이 돌아오면 며늘아기는 상경했고 두 손자는 어린이집에서 배운 재롱잔치로 온집안을 기쁨으로 들썩거리게 하였다.
쿠다당! 쿠다당!
장난감 총을 쏘며 앞뒤로 뛰어다니고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면 옆집 앞집에서 연속 벨이 울리고
경비실 아저씨가 나타나 정중하게 허리 굽혀 소음을 자제해 줄 것을 건의하곤 했다.
"자기네들은 더 하면서"
딸애가 야속하다는 듯이 불평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경상도 지역에서 자란 꼬마들의 함성은 일반 소음측정 평가보다 훨씬 심한 감이 있었다.
며칠 동안이지만 집안가득 유쾌한 웃음소리가 만발하고 평소 부엌일에 무심한 딸애의 즉석 요리가 경상도 꼬마들과 그애들 엄마를
환영해 주는 뜻으로 끼니마다 등장했다. 꿈결같은 시간들이 흘러가고 그들이 귀가할 때쯤이면 또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아파트 마당에서 멀어져 가는 차의 꽁무니에 마냥 손을 흔들어야 했다.
당연히 올해 여름에도 그것이 가능한 줄 알고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부터 나는 슬슬 장을 보아다 놓기 시작했다.
특히 더덕 구이를 좋아하는 며늘아기를 위하여 강원도에서 출하된 산더덕을 사다 껍질을 벗기고 불고기처럼 양념장에 듬뿍 재워놓기도 하였다.
좀더 현대적으로 새로 개발한 음식을 주문하는 딸애의 요구가 있었지만 나는 새로운 요리에 대해 등한했고 그럴 짬도 없었다.
평소에 먹는 것은 건강 유지를 위한 기초적인 것으로 만족했으며 입을 호사시키기 보다는 두뇌와 가슴을 채우는 일에 더 급급했다.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데요!"
난데 없는 아들의 발언이었다. 예약한 큰 병원이 삼성의료원이라고 했다.
방학이 시작되자 마자 며느리를 데리고 큰 병원에 갔다. 별 것 아닐 거야. 지가 나이가 몇인데 무슨 큰 병을? 밥먹는 모습을 보면 옆사람이 침이 흘러나오도록 무엇이나 잘 먹는 아이가? 그럴리가 없어! 나는 자문자답하며 불안감을 떨쳐냈다.
7월 땡볕이 뜨거운 날 나는 며느리를 데리고 국립암센터에 갔다.
연속해서 검사 검진이 이어졌고 진단 결과도 빨리 확인할 수 있도록 부탁해 두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며느리는 진찰실 문에 기대어 줄줄 눈물만 흘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불같이 화가 났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볼까도 싶었다. 왠지 오진은 아닐까.
휴가철이어서 중요 의료진들이 출타하고 없는 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기만 하였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엄연한 사실. 속히 서둘지 않으면 수술조차도 힘든 상황이라고 담당 의사가 경고했다.
무려 5시간에 걸친 수술. 중환자실과 회복실을 거쳐서 입원실로 돌아온 며느리 얼굴은 완전 사색이었다.
"환자가 환자 돌봄이가 됐네!"
딸애는 내 어깨를 주무르고 두들겨 주면서 환자 보다 엄마가 더 힘내야 한다고 부추겼다.
힘을 내려고 안깐힘을 쓰는데도 며느리보다 내가 먼저 쓰러질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친정으로 보내던 날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엄마는 엄마 역할 잘 한 거야. 엄마로서는 최선이었어!"
딸애가 유능한 변호인처럼 나를 두둔했지만 나 역시 덜컥 병이 나버렸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게 과연 무엇이 있나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15년 전 큰 수술을 겪고 자리에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선채로 법화경法華經을 사경했던 일,
비장한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의 권유로 중국어 공부를 시작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공부만이 살길이야. 엄마 공부 다시 시작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야 그 때나 지금이나 오직 한 방향 한 가지 뿐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가을에는 더 방황하지 말고 해오던 일 마무리 하자. 그런 다음 섬진강변에 작은 오두막을 짓자.
그것만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 아닐까.
항암치료로 속이 뒤집힌다는 며느리 생각하며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작품쓰기를, 공부를 더 치열하게 해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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