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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을 믿을 게 있다고

능엄주 2021. 7. 19. 00:57

뭣을 믿을 게 있다고

 

뭣을 믿을 게 있다고, 뭐가 잘 났다고  온 밤을 지새우냐?

코로나 비상 시국에 뭣을 믿고 밤을 홀라당 지새우냐고? 야차하면 감기 잘 걸리고, 야차하면 배탈 잘나고, 야차하면 허리야 등허리야 아이구구 하면서 왜 밤까지 지새우고 으시시  한기나고 콧물에 재채기를 연발하냐. 미련하고 아둔하다. 

 

여러 날 동안 밖에도 못 나가고 주의를 한다고 했으면서 장례식장 다녀오고나서 갑자기 분발, 각성, 개혁, 변화를 모색한다고 분주를 떨었던가. 장례식장을 어디 평범하게 다녀온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들어가면서 故 변아델라 명패보는 순간부터, 그리고 영정이 모셔진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폭포수처럼 터지는 눈물, 그게 그냥 흘러나오는 액체가 아니라는 거지. 이 바보야. 흔한 눈물이 아니었어. 그건 피눈물이야. 흘린 양민큼 내 몸에서 진액이 빠져나간 거란 말이지. 몸을 가눌 수없이 기운이 몽땅 분산되는 것이라고. 故 변아델라는 바로 내 동생이니까.

 

소설이 뭐가 대단해. 나중 책을 내면 되고 영 안내면 또 어때. 나로 인해서 지구가 멸망하는 이변이 일어나는 것 아니잖아. 어쩌자고 하룻밤을 꼬박 앉아서 지새우고 재채기를 선물로 받은 거냐고. 이제 어떻게 할거야? 내일  백병원에 가려고 했어. 목과 등허리. 등 날개를 정밀검사 하려는 뜻이었다고. 교통사고 환자 하는 동안 '나 여기가 무지 아파요. 등날개를 중심으로, 머리꼭지부터 발바닥 복숭아씨뼈까지 저리고 애리고 몹시 아프다'. 소름 돋는다. 경련이 일어난다고. 가는 병원마다 닥터에게 절실하게 말했어. 말을 새겨 듣지 않는 것 같아서 아예 큰 글씨로 인쇄해서 출력해서 가지고 가서 보여줬다고. 

 

그런데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어. 반말에다 소리를 뻑! 지르면서 소리 따로, 눈 따로였어. 환자의 말을 듣기는커녕 컴퓨터만 들여다보면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 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 환자를 힐끗 본 게 전부야. 환자말 들을 필요도 없다는 식이었어. 게다가 약 처방은 완전 삼천포야. 그 요상한 약 먹고 지하쳘 타고 졸다가 어디까지 한정없이 간 거야. 치매 걸릴 번 했다니까. 재은엄마는 소화가 잘 안된다고 갔다가 약을 한 달치씩 큰봉지 가득 받아와 먹다가 갑자기 치매걸리고, 선배는 폐암이랬다가 치매로 유명을 달리했어. 두 분 다 정갈하게 사신 분들이었지. 나보다 월등히 건강상태가 양호했다고. 혹 나에게 신약 실험한 게 아니었나 의심스러웠다니까. 하 이상해서 닥터가 처방해준 약을 인터넷 검색하고 나는 기절할 번 했어. 내 증상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그렇게 많은 부작용을 포함한 생전 듣지도, 복용해 본일도 없는 약이었다. 

 

그 약 먹고 정신 놓고 밤낮 분별없이 잠만 퍼잤다고. 아시겠어요? 그런 식으로 신축년 꽃시절이 허무하게 흘러갔다고요. 무엇을 고쳤어? 어느 부위가 좋아졌는데?  오히려 전보다 훨씬 몸 상태가 퇴보했다고 실감했다. 이렇게 되면 로빈 쿡의 의학시리즈 [매스] [브레인] 등 미국 의료계의 실화소설이 생각난다. 제약회사의 하수인으로 변한 의료계의 비화였어. 젊은 임신부들을 유산시켜서 태반을 채취하고. 어린 소년에게 노화 실험을 해서 늙은이 만들고, 이루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의료 현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던 일.

 

평생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쯤 되는 사람이 나에게 '왜 불신의 시각으로 보느냐?'고 항의했다. 그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무수저의 관점이 어떻게 동일할 수가 있어?, 암 것도 모르면 입 닥치고 있어. 나는 그의 카톡을 삭제해 버렸다. 노상 인생이 즐거워 희희낙락, 들떠서 노닥거리는 꼴새를 더 보아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향 인연이고 옛 친구고 소용없다. 소통이 안되는데 정서적으로 불일치인데, 동향이면,  친구면 뭘해. 말도 안 통하는데. 너나 잘 믿고 잘 먹고 잘 살아!

 

깊은 밤 그만 주무시자. 또다시  밤을  지새울까 겁난다. 무엇을 위하여 밤을 새우겠나. 다 허망한 노릇이다. 몸이 괴롭다면 즉시 쉬어주는 게 최상의 건강법이 아닌가. 앞으로 더 글을 쓸 량이면 목, 등, 어깨의 통증을 완화 내지는 치유하는 게 옳다. 너무 오래 꾸물거렸다. 시간이 빠르게 질주하는 가운데 내 사고와 행동은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그 사이 사건 사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나 자신에게 너무나 소홀했음을 인정한다.

 

 환자를 볼모로 삼고 수익을 극대화시키는 그들을 믿은 게 불찰이지. 결정적 실수지. 대체 무엇을 믿고 그리 방심할 수 있었을까. 뭐가 잘 났다고, 뭣을 믿을 게 있다고? 어처구니가 없다. 내일은 실행에 옮기자. 성의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