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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 째

능엄주 2021. 6. 19. 18:20

다섯 번 째

 

나는 오늘 다섯 번 째 병원을 방문했다. 백 여덟 번을 망설이고, 뜸들이고, 번복에 번복을 거듭하다가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 가기 싫었다. 어떤 병원, 어떤 의사, 어떤 치료도 그동안 너무나 식상食傷하고 실망한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병원에 가면 갈수록 더 참담한 중환자가 되어간다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본래 환자가 아니었다.

 

강원도 산간지역의 시월은 새벽과 밤에 겨울처럼 추웠다. 나는 강원도 오지라 할 수 있는 곳에 두 달간 머물며 소설 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추운 것이 집중에는 더 도움이 되었던가. 유독 매지사 맨 끝방인 내 방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방안에서도 발이 시리고 오싹 한기를 느꼈지만, 패딩 코트를 겹겹이 껴입으면 추운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끼니마다 정성껏 마련해주는 토지문화관의 식사로 추워서 감기 든 일은 아예 없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원고 매수에 서서히 자신감이 고조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면 되는구나! 나는 쓸 수 있구나! 스스로 대견하고 감사했다.

그 원고를 완성하려고 현장답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덮친 사고. 처음엔 별 것 아닌 줄 알고 한방에 갔다. 전에 침을 맞아본 경험에 의하면 갈 때는 절둑거리며 갔지만, 돌아올 때는 마음 가볍게, 아픈 무릎이 가뿐해져서 유쾌하게 돌아왔다. 침 맞는 데에 어떤 불편도 아픔도 없었다. 이번에 간 곳은 완전히 실험실의 개구리였다. 그 개구리가 필시 나였다. 더 낭패를, 이차 가해를 당한 꼴이 된 것. 평소의 생체리듬이 파괴되고, 교란당한 느낌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나는 어려서 입맛이 까다로워 깡마른 어린이였다. 병원 출입이 잦았던 것은 나의 아버지 성씨가 희성稀姓에다 독신으로서, 딸 아들 구별없이 애지중지한 이유가 한 몫 했던 것으로 헤아리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였는지, 전염병 - 치사률이 높은 염병으로 일컫는 장질부사 창궐, 국가적 시대적 상황으로 삶이 고단한 이웃들이 나날이 죽어나가던 폐결핵 대 유행, 말라리아와 고뿔은 누구나 흔하게 걸리던 시절이었다.  

고1까지 키가 154cm로 작은 편이었다. 그것은 내 바로 위의 오라버니와 연년생으로 태어난 딸인 나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더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버지는 자식 여럿 중에 잔병 치레가 잦은 나에게 더 신경을 썼던가. 나는 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언제나 어머니 보다는 아버지를 먼저 찾았다. 이처럼 치료가 지지부진한 시점에서 나는 생시의 아버지 사랑이 사무친다. 오직 아버지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상급학교 진학할 무렵 시행하는 신체검사에서 6살 때 페를 앓아 한 쪽 폐가 화석化石이 된 것 외에는 봄 가을 운동회, 땡볕 아래 매스게임 연습에도 하등 이상 증세 없이 초중고 과정을 순탄하게 보낸 셈이었다. 병약하기 시작한 것은 결혼 이후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큰 병, 이름 있는 병을 앓은 일은 없다. 산후조리 불량과 시작도 끝도 없는 가사노동이 버거운 게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 보수가 전무하니 직업이랄 수도 없는 - 어머니 역할, 가정주부가 그 어떤 직업 군보다 힘들다고 여긴다.  

 

무엇보다도 근래 석달 가까이 병원 출입을 한 것은 황당하다. 머리가 흔들린다는 것, 사정없이 어지러운 것은 견딜수가 없다. 머리가 흔들리면서 눈이 흔들렸고, 눈과 귀가 기능이 떨어지는 것, 몸의 균형이 잡히지 않아 병원 볼일 외에는 거리에 나가기 어려워진 점 등이다. 일상의 질서가 깨진 것이다.

 

나는 번개놀이같은 3분 진료에 환자로서 증상을 한 마디도 피력 못하는 것을 우려해, 미리 큰 글씨로 내 증상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해서 닥터에게 보였다. 유념하기는커녕 싹! 무시, 방심하는 태도에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생면부지 초면의 환자에게 왜 반말을 하는지? 환자의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반말이 가능한가. 의격醫格은 어떠한지 몰라도 인격은 제로로 보였다. 그뿐인가. 어지러움이 극심해서 병원을 찾은 건데 변비, 요저류(방광을 완전히 또는 전혀 비우지 못하는 것), 구강건조, 졸림, 어지러움, 낙상, 안압상승을 유발하는 약을 처방한 의도는 고의성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가 없다. 약 먹기 전보다 더 전신이 내둘렸고, 입천장까지 조갈이 나서 물을 수도 없이 벌컥벌컥 마셨으며, 소변에 해괴한 증상이 나타나 하루종일, 한밤중에도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졸립고 어지럽기가 더 심화되었다. 변고 플러스 변고의 연속이었다.

 

"이모! 약 이름을 검색해 보시고 수상하다 싶으면 그 약 버리세요. 복용하지 마세요!"

 그날 현장답사에 함께 간 조카의 의견이었다.

 혹 나를 새로 츌시한 신약新藥의 실험대상자로 보았던가. 분명히 나는 두통과 어지러움증을 호소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너무나 어지러워 목과 어깨 아픈 건 둘째였다.

 

위압威壓적이고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에 불과한 3분이 나는 더 할 나위 없이 거북스러워 치료 종료를 서둘렀다. 약처방도 가는 병원마다 제각각, 현재의 내 증상과는 동떨어진 약처방 때문에 혼수상태의 수마睡魔로 점점 바보 멍청이가 되어가는 모양새였다. 막무가내로 잠만 퍼 자다가 보니 2021년 유월 하순으로 접어든 것, 이거 기막힌 현실이 아닌가.

종료는 치료 포기. 환자 졸업. 내 생애 병의원을 완전 결별하려는 의지의 발로였다. 치료가 별무효과인데 왜 금쪽 같은 내 시간을 낭비하나 싶었다. 일찍이 미국 현역 의사 '로빈 쿡'의 실화 소설을 열독熱讀한 것도 한 이유일까. 독자적으로 나는 다른 선택을 해야했다. 보험 혜택이 안되는 의료비용을 내 지갑에서 결재하기로 작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 코로나19로 통화마저 뜸했던 이웃에게 전했다. 무슨 특별한 답변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나는 늘 엎드려 글쓰고 읽는 일에 바빠서, 누구와 수다 떨고 차 마시고 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좋은 글, 공부할 거리가 너무나 많고, 쓸 이야기도 줄을 이었다. 다만 내 몸이 마음을 따라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코로나19로 아파트 주민들과 나무그늘  벤치에 앉는 일도 근래는 드물다. 나는 너무나 답답했다. 이웃이 말했다.

 

"어머나 그런 일이 있으셨어요? 하도 연락이 없어서 강원도에 아직 계신 줄 알았어요."

비로소 찾은 것인가, 만난 것인가. 내 하소연을 듣고 그 이웃이 한 곳을 알려 주었다.

"한 번 가보세요!  가 보시면 알아요!"

 

그 병원은 나에게 어떤 병원일까. 어려서 아버지 등에 업혀 달려가던 남궁외과 같은 곳? 나는 기대 반 우려 반, 오늘 아침 그 병원을 방문한 것이다. 교통사고 이후 다섯 번 째 병원이었다. 병원에 다시 가기로 한 것은 내 마음이 아니고 내 증세였다. 어지러움이 심하면 장차 나에게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누가 아는가. 지하철에서 졸다가 한정없이 가서 나는 얼마나 당황했던지. 부처님 오신 날 모처럼 외출했다가 엉뚱한 데를 헤맸다. 그 반말 닥터가 처방해준 독약?이 주범이었다. 나는 마약 같은, 아니 독약?이나 던져주는 닥터에게 더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 째 병원에 희망을 걸어본다.  화탕지옥에서 해방되고 싶을 뿐이다. 나에게  새로운 제안提案을 해준 지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