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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못했어요

능엄주 2021. 6. 18. 18:55

졸업 못 했어요

 

거의 하루 걸러 비가 내린다. 반짝! 하루 한 나절 개이는가 싶어 마음 놓으면 밤새 바람 거칠고 비가 내렸다.

심란한 그런 밤을 지낸 날이면 6.25 때 폭격으로 불타다 비끄러져 남은 우리집 대문처럼, 내 얼굴에 저승사자와 밤새 싸운 흔적이 확연確然하다. 거울을 보고 기절할 지경이다.

 

이 사람아 거울을 보긴 왜 봐? 또 하나의 나가 소리친다. 병원엘 가면서 거울을 어떻게 안 보나? 내 발로 병원이라도 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 자문자답하면서 집을 나서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른 아침에 누구지? 가방을 열고 폰을 꺼내든다. 머리 위로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진다. 한 손에 폰을 든채 다른 손으로 양산을 펼친다. 오후에나 비가 그친다고 했던가.

 

"벌써 밖에 나왔어요?"

 네. 병원에 가요!

"아니, 환자 졸업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답변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한다. 마음은 집을 나서기 전부터 바빠지고 있었다. 종착역에서 버스를 타려면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1분 차이로 앞차를 놓치고 20분, 어떤 날은 30분 이상 기다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환자의 비애를 실감하는 장소가 이곳이다. 3호선 종착역에서 더 멀리 시외로 가는 정류장은 여러 종류의 버스가 앞 다투어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이 뛰다가 서로 엉키고, 발을 밟히고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병원 다녀와서 전화드릴 게요. 나는 전화를 길게 할 여유가 없다.

한 입으로 두 말을 내가 한 것인가.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그는 내가 병원가는 와중에 전화를 받은 게 오히려 고맙지 않은가. 불만스럽게 "그래요!" 한 마디 퉁, 내던지듯 말하고 통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환자+ 병원+치료= 졸업 못했어요. 내가 원했던 결정이 아니라고요.  전적으로 내 의사意思에 반하는 일이라고요.

 

그가 나의 이런 심중을 헤아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갈길을 재촉했다. 가는 길이 아득해 보여도 일단 집을 나선 것만으로도 기분은 좀 가벼웠다. 따끈따끈한 핫팩과 안마의 시간이 그리워진다. 비가 내려 내 까칠한 감성이 내면 깊숙이 응축, 더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긴 세상 살면서 마음도 몸도 생활도 아파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나는 두렵다. 그들 마음에는 아픈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해하려는 모습도 발견하기 어렵다. 굳이 어설픈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다. 내 딸 역시 그 부류가 아닌가. 며칠 전에는 들깻잎을 한 보따리, 엊저녁에는 완두콩 한 자루를 사갖고 왔다.  오늘은 또 무엇을 사들고 올지, 늘 그렇게 내가 힘든다는 것을 모르는 딸이 나는 야속하다못해 밉다. 

 

한꼭지 한 꼭지 콩을 까는 작업은 지금의 내 목과, 어깨, 등, 허리에 유익하지 않다. 마우스 움직이는 작은 동작도 버겁다. 밤마다 어떤 심각한 통증을 견디는지, 왜 약을 먹고 죽은 듯이 잠에 빠지는지, 병원은 왜 노다지 가면서, 아퍼! 아퍼! 노래를 부르는지,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두 지붕, 두 마음과 뭐가 다른가.

 

전화를 받지 말 걸!  내가 환자를 졸업하건 말건, 병원에 가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나는 버스에서 내려 M 정형외과로 걸어가며 전화 받은 사실을 후회했다. 전화도 무엇도 다 그만 두라니까. 꺼버려!

완두콩도 그냥 내버려 둬. 먹고 싶으면 까놓은 걸 사면 되지.

나는 엘리베이터를 오르면서 한 숨을 길 게 내쉬었다. 그리고 빌었다. 이 암흑한 시간이 어서 흘러가기를, 햇볕 쨍! 하고 빛나 인생 마지막 여정을 찬란하게 비춰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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