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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강바람

능엄주 2021. 2. 15. 23:20

여의도 강바람

 

집을 나설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이른 봄에 불어오는 꽃샘바람 정도라고 여겼다.

여늬 때 부는 바람과는 질과 결이 달랐으니, 어떤 강력한 방법으로든 제어하기 힘든 폭군같았다. 한강이 가까워서인가. 늘 소란스럽고, 민생에는 별 소득없는 쟁론의 장인 국회의사당이 그곳에 있어서인가.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하늘로 날아가는 줄 알았다. 훨훨 바람에 불려서 멋대로 궁글러가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근처 건물 기둥이라도 부여잡고 그 자리에 폭 주저 앉고 싶었다. 

 

도저히 발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머리칼이 하늘로 뻗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내 몸뚱이 전체가 몽땅 공중으로 솟구쳐올라갈 듯, 바람의 기세가 몹시 험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두터운 털모자를 쓰고 나오는 건데, 나는 내 머리카락이 사면 팔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 추웠다. 봄이 오고 있다고 여겨 머플러도 앏고 가벼운 것을 두르고 외출했던 것이다.

 

이런 날씨에는 집에 머무는 게 나을 것을. 죽고사는 볼일 아니면 거리에 나서지 말아야 했어. 한 순간 후회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늘은 사적인 볼일보다 중요한 공적인 일이 있었다. 며칠 전 문자와 전화를 받고 나는 분명히 말했다. 이번 달은 갈 수 있다고. 지난 번에는 내가 강원도에 장기간 머물 때였고, 또 한 번은 치과 예약한 날이어서 불참한 것이었다. 예사로 불참해도 무방한 성질의 볼일은 결코 아닌데 부득이 그랬다. 

 

콧물 눈물 범벅으로 11층으로 올라갔다. 이런 경우 무슨 체면 찾고 거울 찾나? 날씨가 어지간히 험상궂어야 변명을 늘어놓지. 머리칼이 사정없이 뻗쳐있든 말든, 정신도 못차리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2021년도 새로 선임된 이사장 이하 임원들과 기존 이사장 일행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주먹 악수를 나누며 와아! 반가워라!  거친 바람 맞고 온 보람있네!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기뻤고 살맛이 이런 것인가. 절로 얼굴이 밝아졌다.

 

아, 참 그거 메일 해킹.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 되었습니까?  맘 고생 많이 하셨어요!

얼마나 따뜻한 문안이냐? 얼마나 살가운 염려냐?  해킹 당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을 때, 전화로 갈피를 잡아준 분들이었다. 같은 단체 동료인 여자는 해커 놈들에게  자세한 사항을 말해달라고 메일을 주고받고, 제멋대로 단톡방에 올려 나를 우세시켰다. 건방지고 경솔한 망동, 무슨 좋은 소식이라고 삼지사방으로 소문을 퍼트려놓고 잘못을 모르는 후안무치, 그여자와는 완전 다른 차원이었다. 찬바람이 가슴팍으로, 겨드랑이로 사정없이 파고들어 오싹오싹 한기가 났으나 마음은 푸근했다. 듣던대로 국제 PEN이 격이 다르긴 다르구나! 했다.

 

신입회원 심의議는 급 스피드로 선회했다. 현 이사장 임기 4년에 걸친 총정리라 할까. 오늘따라 검토할 장부가 몇 권, 이사장님 사무총장 그리고 시인, 아동문학가, 소설가가  돌아가면서 일일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대조하고 미비한 부분을 찾아 보완하는 작업은 분량이 제법 많았다.

결석한 심의위원의 사인이 필요한 거였네요. 오늘 졸업하는 줄 알았어요. 내 말에 우리는 마스크 얼굴을 들어 미소를 나누었다. 실제로 4년동안의 입회심의 최종 마무리, 종료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내 이름자를 가장 많이 사용한 영광스러운? 하루였다. 매사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밥을 국에 말아놓은 상태로 집에 놔 두고 왔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 밖에 나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니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을. 

 

돌개바람인지 광풍인지 모르지만 여의도의 한강바람은 나에게 유쾌한 바람이었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그말의 의미를 넉넉히 수용할수 있을 것 같은 날이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가슴 따숩고 사람 향기 나는 동네에 내가 들어온 것같았다. 무슨 일이든 맡겨만 주세요! 저 자신있어요! 기세등등한 여의도 강바람처럼 자신감이 퐁퐁 솟았고 알 수 없는 의욕이 밀물져 왔다.

 

글 쓰는 사람들이라고 모두가 속 깊은 사람들일까. 아니었다. 동네마다 그 성격이 다르고 장르마다 사람마다 제 각각이다. 오늘 내가 맞이한 여의도 강바람은 말 그대로 봄을 잉태한 바람, 사랑의 바람이었다. 무서운 메일 해킹! 선량한 심성과 조우하는 기회를 내게 준 것 같다. 다음 번 단체장 선거할 때 나는 두루 말하리라. 바로 이와 같은 마인드를 지닌 인물을 선택해야한다고. 밤이 깊어가면서 더 요란하게 창문을 두들기는 바람소리. 그 바람은 나에게 봄이 오는 소리. 희망의 멜로디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