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거나 사오지 마
입맛이 까다로워 진 이유도 있을 거다. 하긴 코로나19에 잔뜩 겁을 먹고 집에만 노상 들앉아 있어, 삶의 의욕도 입맛도 숫제 감소한 게 원인일까? 나는 저녁마다 무슨 구호보따리처럼 큰 봉지를 들고 오는 딸애를 나무랬다.
- 누가 먹는다고 물건 같지도 않은 걸 사들고 오냐?
겉모양은 그럴 듯한데 먹어보면 전혀 아닌 것들, 과일이 그렇고 채소가 그렇다.
흔히 말하는 과거 사람, 옛날 사람이어서일까. 무턱대고 "우리 어릴 때는~" 으로 시작해서 딸애의 현대감각?을 무찔러버리는 꼰대가 나인가?
- 아무 거나 사오지 말고 돈 아껴써!
이게 복숭아맛이냐? 그게 자두 맛? 토마토, 사과 맛? 수박, 참외, 포도맛? 거의 모든 과일 맛이 각각의 특유한 맛을 잃고 들치근한 게 공통점이다. 하루 이틀 지나면 시들지도 않고 곧바로 썩는다. 사오면 바로 먹어야 하는데, 그럼 위장에 내려가서 썩게되는가. 생명력이 없는, 겉은 번지르, 포장도 멋지고 그럴 듯 하지만, 과일과 채소맛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변화의 흔적을 요즘 애들은 잘 모르겠지만, 먹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게 내 주장이다. 돈버리고 위장버리는 일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딸과의 티격태격은 거의 매일이다. 벌레가 먹을 수 있는 식물은 사람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호박 한개를 사더라도 농약 좀 덜 먹은것 (안 먹은 것은 없을테니까), 저대로 자연과 더불어 자란것, 덩치만 크게 조작해서 무 한개가 무슨 기둥처럼 엄청나게 커버린, 질긴 칡뿌리 같은 것, 껍질은 두터워 가죽 같은데 속은 곯아 있는 참외.
- 제발 사오지 말라고! 처치 곤란이야.
세상이, 기후가, 토질이 다 변했는데 엄마 입맛만 찾으면 어떻게 해? 나는 맛이 괜찮은데.
- 너는 네 맛대로 살고 나는 내 맛대로 살자. 먹든 버리든 네가 알아서 해!
오늘은 이마트로 가볼 것인가. 인근의 대형 수퍼로 가볼 것인가. 한살림 매장? 말이 유기농이지 언제부터인가 값만 비싸고 품잘은 전처럼 신뢰가 안 간다. 그 어느 곳도 갈곳이 만만치 않다. 오염이 덜 된 시골에 텃밭을 손수 가꾸지 않고서는 입맛을 되찾을 수 있을지 막막한 심정이다. 배고프면 다 맛있어.
- 너 혼자 잘먹고 잘 살아. 나는 산골로 가든지 이런 거 먹느니 굶을 거니까.
내가 시장 보는 일이 힘들것 같아 착한 마음으로 사오는 거겠지만, 과일 하나를 사더라도 잘 보고 제대로 사라는 뜻이다. 힘들게 버는 돈 함부로 쓰지 말라는 거다. 내 말이 강하게 나갔다.
옥신각신이 길어지다보니 냉장고가 텅 비게 되었다. 국내산 콩으로 제조했다는 두부도, 콩나물도 고유의 제맛을 잃어버린지 모래 되었다. 깻잎도 밤새 전깃불 아래서 잎새만 크게 키운다나. 뭐든 질보다 크기만 강조한다. 어릴 때 먹어본 그맛까지는 아니더라도 금방 썩는 식품은 돈이 아깝다. 불량 음식을 섭취하면 인간도 불량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일단은 집밖으로 먹이를 구하러 나가야 할 것 같다. 냉장고가 비었다는 사실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아파트 단지 골목 한 귀퉁이에 벌여놓은, 토박이 할머니들의 부추, 호박 가지, 아옥, 뭐 한 가지라도 가트에 담아오자. 완전 믿을 수는 없어도, 그들에게 맛을 분별하는 의식?이 있다면 농약을 덜 치지 않았을까. 아주 드물지만 가끔은 순수한 호박잎의 향기를 발견하는 때도 있다.
먹거리에 대한 경각심 없이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비만, 암같은 성인병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까. 나의 고지혈증도 약으로만 다스려 완치된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다. 가려서 고르고 신중하게, 나는 어절 수 없이 가트를 끌고 단지밖으로 나서는데 항생제 때문에 사람의 수명이 길어졌다는 친구말이 생각난다. 무조건 대형으로 키운 식물먹고 인간도 대형, 뚱뚱보가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