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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食口

능엄주 2020. 6. 18. 16:28

식구

 

먹을 口, 식구 는 한집에 살면서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라고 한다. 요즘 세태는 한집에 살아도 밥을 따로 먹거나 먹는 시간이 각자 다른 경우가 흔한 현상이다. 어찌 됐든 한 공간에 거주하는 가솔, 가족이라면 적어도 하루 한끼라도 가족과 함께 먹는 것이 정상일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 같지만 어려울 수도 있다. 배고픈 시간, 음식에 대한 기호가 서로 다르고, 외부의 일 때문에 가족과 함께 집밥을 즐길만한 시간 여유가 없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근래 성행하는 혼밥, 독거는 가정생활의 기존 질서라든가 생활방식을 돌이켜보게 하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밥을 같이 먹고, 식탁에 가족들이 정답게 둘러앉아 식사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야기는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혼자서 무슨 맛이냐고. 그러나 혼자라도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으니 그런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사치로 보이기도 한다. 맛으로 먹나? 살기 위해서 먹지. 그렇게 말하면 더 할 말이 없다.

 

이름있는 모 인사댁에서 얼마간 머물 때였다. 그댁의 가장은 늘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귀가했다. 술도 얼큰하게 취해서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리며 갈짓자 걸음으로 언덕위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안 주인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맛난 음식을 장만, 찌개가 식어가는 데도 밥을 먹지 않았다.

 

그게 한두 번 아니고 매일 계속된다면 체념할 만도 한데, 교수인 그 댁 안주인은 남편이 없는 식탁에 혼자 앉는 것을 몹시 꺼리는 것 같았다. 그 댁에서 나름 임무를 맡아 숙식하고 있는 서생들은 배고픔을 참고 밤이 늦도록 원고지나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

 

늦게 귀가한 가장이 그 밥을 먹을까? 푸짐한 요리와 구수한 찌개 냄새에 이끌려 식탁에 다가앉을까. 여보! 수고했어요. 우리 밥 먹읍시다! 그렇게 말할까. 천만에! 아니었다. 그는 식탁은커녕 안주인 얼굴도 외면하고 그의 침상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랬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술에 약했던가. 술버릇이었나.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다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호통이 아니라 술주정이었다. 여자들만 득시글 거리는 집안 공기에 질식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일종의 모임, 회의가 열렸다. 회의 주제는 그 가장에 대한 징계, 혹은 분리에 관한 것이었다. 몇 몇 서생들에게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그 댁을 떠나 다른 일자리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대부분 스물하나, , 셋 정도의 처녀 서생들은 입을 모았다.

교수님! 혼자 사세요. 뭐가 부족해서 저런 술망난이하고 함께 사십니까? 우리가 있잖아요였다. 그 우리가 누구인가? 피가 섞였나. 살이 섞였나. 영혼과 감성이 교감하는 처지인가.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매 학기 등록금을 모을 수 있는 소중한 일터이기 때문이었을까. 결론은 41로 퇴출, 별거, 안주인이 홀로서는 것에 찬성표를 던졌다.

 

안주인도 그 결과를 쾌히 인정, 수락했다. 여생을 조용히, 좀 우아하게 홀로 살겠다고. 너른 대지에 텃밭과 정원, 호수를 아우른 시외의 아담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고, 슬하에 자식도 없어 분가는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교수님 결심은 하룻밤이 지나자 돌변했다. ‘지금보다 더 늙어 사지에 힘이 떨어졌을 때에도 얼굴 마주 보고 밥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는 말씀으로 변심을 표출했다. 회의를 처음 발의한 것도 안주인이었고 그녀들은 단지 의견을 표시한 것이었는데, 교수님은 오직 밥 같이 먹을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한밤중에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우당탕탕! 집안을 소란스럽게 구는 게 한두 번인가. 뭐가 모자라서 저런 남자하고 살아? 별꼴이야. 젊은 여자애들은 뒷방에 앉아 수근댔다. 그렇다. 밥 같이 먹을 사람. 교수님은 한 공간에 살면서 함께 밥숟갈을 들 수 있는 식구 간절하게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들은 마지막 작별하는 날까지 안주인 1, 가장은 2층에서 일하는 사람을 따로 거느리고 각자도생했다.

 

밥 같이 먹어줄 사람, 그게 쉬운 항목이 아니었던가?

요즘 나는 혼자 밥 먹는 데에 실증이 났다. 실제로 밥맛이 안 난다. 딸이 일찍 귀가하지 않으면, 이것저것 잔뜩 시장봐다 놓고도 냉장고에서 그것들을 꺼내지 않는다. 고작 삶은 계란과 빵 한 조각, 과일 한 개뿐, 식탁에 무엇을 더 벌려놓을 의욕이 없다.

 

할머니! 나 배고파요! 고기 구워주세요!”

학교 수업이 끝나, 학원에 가기까지 약간의 틈을 타서 달려오는 손자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다..

'얘야! 이것좀 먹어봐!  너 줄라고 할머니가 새로 만든 거야.' 하면서  함께 먹는 밥. 맛있게 먹는 밥. 어쩌면 한가한 투정 같은 말이 오늘 아침 나에게 새삼스럽다.

예고도 없는 손자의 방문을 기다리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Al, 로봇이 사람을 능가하는 변화무상한 21세기에도 식구는 너와 나에게 영원히 그리운 명칭인가.(2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