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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영미다리

능엄주 2015. 8. 3. 13:09

‘택시가 영미다리 앞에 이르렀다.

신당동 L 선생님 댁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어둠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청계천으로부터 바람이 싸아! 하고 차갑게 불어왔다. 그들은 뒤뚱뒤뚱 영미다리를 건너 제일 꼭대기 지점에 위치한 L 선생님 네의 망루 같기도, 비둘기 집 같기도 한 집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변영희 장편소설 <마흔넷의 반란>중에서

 

1960년 대 초 종로에서 신당동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 <영미다리>라는 엉성한 다리가 있었다. 영미다리를 중심으로 청계천 풍경은 모름지기 ‘굳세어라 금순이’ 시절을 연상시키는데 그다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또한 그것은 부산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의 정서와도 일맥상통하는 요지로 서울특별시의 과거와 현재에 걸쳐서 온갖 남루가 영미다리를 주축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다닥다닥 붙여 지은 피난민들의 판잣집에서 판자조각인지 쌀을 담았던 회 포대 봉지 찢어진 것인지 모를 것들이 미친년 치맛자락처럼 사나운 북풍을 따라 울며 펄럭이던 곳, 바로 청계천의 기구한 내력과 실상이 거기서 그렇게 연출되고 있었다.

 

영미다리를 건너기까지는 그게 불과 십여 분에 못 미칠 만큼 짧은 시간이었으나 서울시를 흘러나온 잡다한 오물과 상심과 향수와 핏멍울과 모욕과 서러움, 원한이며 그리움 따위들이 빽빽하게 경색 증상을 유발하며 흘러갔다.

더러는 넝마 나부랭이에 걸쳐진 채로 지독한 악취와 구토를 일으키거나 코를 막게 하였다. 전쟁후의 중첩된 가난과 그 시대의 통한을 너울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청계천 영미다리를 우리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건너 다녔다.

 

행여 L 선생님과의 약속시간에 늦을 새라 허름한 주머니를 털어 택시를 타긴 했어도 언제나 내리는 곳은 영미다리 근처였다. 그 이상은 택시가 갈 수 없는 미로 같은 가파른 비탈길, 겨우 한두 사람 지나다닐 정도의 좁아터진 골목이었다.

 

영미다리는 그 옛날 단종이 그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가면서 그의 부인 정순왕후와 이별한 곳으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그 이별이 단종과 정순왕후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누가 알았으리오. 그래서 ‘영 이별, 또는 영 영 건넌 다리’ 라는 뜻으로 전해져 오다가 성종 때 영미사 스님들이 돌로 다리를 놓았다고 했다.

 

정순왕후는 여랑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14세에 왕후로 책봉되어 신혼 생활 고작 1년 반 만에 단종과 생이별을 했다. 낙산 골짜기에 정업원(淨業院)이라는 작은 초가집에 기거하며 그녀는 날마다 영월 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단종이 서울로 무사히 귀환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영미다리는 작가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우리들에게 L 선생님 댁으로 가는 지름길 역할을 했으므로 영미다리가 우리들에게 추억의 다리였다면 정순왕후에게 있어서는 애간장이 녹아 흐르는 상심과 이별의 다리였다.

 

역사는 쉬지 않고 흘러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말미암아 국토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문명의 발달과 확대가 보편화되면서 영미다리를 비롯한 청계천 일대는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헉헉거리며 숨 가쁘게 오르내리던 골목길이 동서사방으로 넓게 뚫려 꼬방 동네, 판자촌 그림은 간 곳 없이 사라져 갔고, 새로 지은 집들 사이로 자가용 승용차가 줄을 이어 씽씽 달리고 있다.

 

썩고 냄새나던 청계천이 서울정도 600년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놀라운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청계천은 푸르고 맑게 서울 시내를 관통하고 있으며, 그 위로는 각기 특색 있는 이름을 가진 다리가 건설되었다. 서울 시민은 물론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관광차 청계천을 답사하고 있다하니 천지개벽, 상전벽해가 따로 있음이 아니다.

 

작가지망생인 우리들에게 엄격한 시어머니였던 L 선생님. 영미다리 근처에 오래 사셨으나 끝내 청계천의 기적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셨으니 아쉬운 마음 비길 데 없다. 신당동 높은 언덕의 망루 같기도 비둘기 같기도 한 L 선생님의 정다운 집. 그 시절 2층 다락방에서 바라보는 남산타워와 서울 시내 야경은 또 얼마나 슬프도록 아름다웠던가.

 

청계천이 만고의 오욕과 누진을 벗고 새로 탄생 했듯이 영미다리를 건너가 교수이며 작가이신 L 선생님 밑에서 스물 하나 위태로운 고비를 힘겹게 넘어온 나의 문학도 맑은 물줄기 되어 도도하게 흘러갈 날을 기대해 본다. 은우, 일구, 간간이, 꽁꽁이, 정희, 삼삼이와 그리고 갓 뽑아 온 가을무처럼 씽하게 잘 생긴 몇 몇 남학생들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청계천 물가를 거닐며 그 시절의 영미다리를, 영미다리 좌우사방의 풍경을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