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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푸터 노이로제

능엄주 2020. 6. 10. 14:54

컴퓨터 노이로제

 

나에게 더 좋은 일, 삶에 보람과 자긍심을 안겨주는 일이 있었다면 이처럼 컴퓨터에 종일 붙어앉을 수 있었을까.

어려서 무슨 글을 써서 보여 주면 아른들이 잘썼다고 칭찬해주는 맛에 글을 쓴 것 같고, 나 스스로도 글쓰기를 즐겼던 것 같다. 철이 들어서는 일이 뜻대로 안 풀려 속이 폭폭 상할 때, 누구에게도 말 함부로 못하고 꾹 참아야 할 때, 마루에 엎드려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렇게 시나브로 써오던 글줄이 80년대에 이르러 더 너른 광장으로 발돋음했다. 각 일간지에서 소위 문화센타라는 것을 개설, 집안 살림에 매몰된 젊은 주부들의 감성에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결혼 생활의 미묘한 갈등을 안고 사는, 30,40대의 젊은 주부들이,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도시락 싸서 학교에 보내고나서, 작은 사회로 대거 진출했다. 문학소녀적 꿈을 실현하는 것은 둘째로 치고라도, 시장 나들이 외에 뭣이든 구실을 내세워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것만도 큰 은혜였다.

새로운 세상이 전개된 것이다. 우리는 고독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의, 단체가 되었다. 매우 부지런해졌을 뿐만아니라 거울이라도 한 번 더 들여다 보게 되었으며, 집밖의 신속한 변화에 순조롭게 적응했다. 해도해도 끝이 나지않는 단순노동, 주방 문화에 대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문화센타에는 당시 유명세를 타는 교수님이 등장, 시 혹은 소설, 수필을 강의했다. 우리는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듯 기쁨이 충만했다. 끝나서 돌아올 때는 그 장소에서 만난 친구와 티타임이 즐거웠고, 대화 내용도 주부의 부엌마당을 종종 뛰어넘었다. 심혈을 기울여 쓴 글솜씨 품평회가 열리는 날은, 교수 강사님의 한 말씀에 어린 소녀처럼 가슴을 졸이며 경청했다. 공부하러 가는 길, 오는 길이 마냥 행복하고 신바람이 났다. 아무도 알아주지않는 주부역할 보다는 훨씬 유익하고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시인이 나오고 수필가로, 소설가로 등단, 문학의 전당에 기왓장 한 장 올리는 신통한 쾌거를 이어갔다. 수많은 직업 군群을 두고 어쩌자고 아내가, 주부가 되었던가. 선택할 것이 그 역할 뿐이었나. 매일 물 손을 닦을 새도 없이 밥하기, 청소 빨래, 다림질, 장보기, 육아전반 등등 집안에서만 동동걸음을 쳤던가.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그 흔해빠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자가 가족의 일꾼, 종이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대가나 보수는 없다.

 

나는, 혹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분실한 것이었다. 다시는 찾을 수도 없는 낭떨어지로 내팽개친 것이었다. 앞이 안 보였다. 그날 그날 등에 지워진 노동이, 역할이 힘겨웠다. 하소할 데도 없다. 부엌데기의 삶,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생 벼랑이었다. 세상에 처음 출현할 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자도 잃어버릴 번, 영육간에 끝없이 고달픈 나날이었다. 특히 나에게는 그랬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가정은 유령의 늪이라고 할까. 언제든 유령의 마수에 걸려 쓰러지게 되어있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진수렁. 남녀의 결혼이 반드시 인격 경재 애정의 결정체가 아닌 것처럼 역경은 자주 돌출했다.

 

드디어 글쓰기에 몰입하는 상태로 진전, 마루바닥에 엎드려 짧은 글쓰기가 어느새 컴퓨터의 노예가 될 만큼, 중노동의 과정으로 변질되었다. 읽고 쓰고 책을 출간하는 일이 고상하기는커녕 한풀이 마당, 치유의 일환으로 여겨지는 서글픈 현실이다. 애초 내 꿈은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제 어쩌겠는가. 계속해서 갈 수밖에는.

 

근래 코로나 19는 생존에 대해 면밀히 점검, 성찰할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아니한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건 동식물이건 경제논리 생존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할 것이다. 인류사의 수다한 전쟁기록은 결국 먹이 쟁탈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현듯 여성의 경제 독립없이 가정에 남녀평등, 민주화가 없다던 고 B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쓰는 일, 읽는 일이 대부분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원고지에 연필로 쓸 때보다 편리한 점도 있지만, 기계와 인간 사이에 간과하기 어려운 첨예한 문제가 수시로 발생한다. 몇 달이고 공들여 쓴 작품 원고가 한 순간에 날아갈 때는 미칠 것만 같다. 최근 랜섬웨어 감염까지 당해 각종 자료가 제목만 남고 하얗게 공란空欄이 된 상황이고 보니, 그만 컴퓨터로 인한 노이로제, 컴퓨터 공포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대두된다.

 

햇살이 가득 내려앉은 마당 있는 집, 하늘 맑고 푸른 시골. 이런 내 소원이 덜 간절했던가. 시골집의 꿈이 왜 이리 더디고 힘겨울까. 컴퓨터 노이로제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도 원주 토지문화관으로의 집필 여행이 바람직할 것 같다. 현실을 잠시 떠나 컴퓨터 대신 파카 만년필로 글을 쓰면서 소중한 시간을 잘 활용하고 싶다.  바람과 물과 새소리가 어우러진 매지리의 자연, 그 가운데 나의 내일이 있다.

(202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