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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아가라 해변의 포도처럼

능엄주 2020. 6. 8. 10:43

나이아가라해변의 포도처럼

 

 

 세상은 부단히  변화를 거듭한다. 바야흐로 제4차산업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극도의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개인주의가 팽배, 인성이 증발하고, 더 높은 수익 창출을 위해 천혜의 자연환경이 마구 파괴되었다. 인간보다는 돈의 가치를 정점에 둔 살벌한 환경속에서 삼라만상은 고초를 겪다 못해 공멸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기 전까지 우리는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경자년 여름, 삼복염쳔을 숨가쁘게 살아가야 한다. 잠깐 밖에 나가도 줄땀이 흘러 마스크가 닿은 얼굴부분이 발갛게 부어오른다. 알렐르기가 생겨 짓무른다.

 

정부의 재난지원금으로 사람들은 면역력 증강을 위해 불고기와 족발 치킨을 사 먹고, 모처럼 좋은 사람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곳곳에서 연속 증가하는 확진자 숫자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번 달에는 모임이 가능할까, 기대하다가 6월이 벌써 8일이다. 몇 달 계속 집콕을 하다보니 매사 의욕이 스러져 게을러진다. ‘이게 사는 것인가?’ 하고 회의에 잠긴다.

 

어떤 이는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 또는 외출 금지로 집에만 있는 가족들 삼시세끼 챙기다 보면 이럴려고 내가 사나?’ 한숨이 나온다고 한다. 또 누구는 하녀노릇이나하고 집에서 뭉개느라 살만 디룩디룩 찐다고 토로한다.

 

코로나 19 사태에 더욱 곤란을 겪는 사람들은, 코로나에 감염되어 가족 얼굴도 못보고,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죽어 나간다는 고령자와, 나를 포함한 삶이 고달픈 서민 대중이 아닐까 싶다.

 

 6개월 힘겨운 집콕의 긴 시간 동안, 치과 진료가 진행되었고, 내 컴퓨터가 랜섬웨어라는 악성코드에 감염되어 일상이 흐트러지고, 경제적 손실이 컸다. 새로 산 컴퓨터에 앉으면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이 살이 불불 떨린다. 자판을 제대로 누르지 못한다. 글쓰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우연이든, 운명이든 터 잡고 오래 살아온 지역을 등지고 산속에라도 들어가야 할까. 코로나 19가 없는, 평화의 땅, 그런 곳이 있기는 있을까?

 

이 절박한 순간, 나는 뜬금없이 캐나다 포도가, 그곳의 청정자연이 그립다. 나이아가라 강바람을 맞고 자연속에서 자연의 이치대로 열매 맺은, 평화의 상징, 그 포도가 왜 이런 시기에 생각나는 것일까. 포도송이만 평화일까. 내 친구를 비롯한 그 땅의 모든 생명은 더없이 평화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이룬 곳, 조화의 세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화가 깨진 곳에는 분쟁과 소요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코로나19가 바로 그런 까닭 아닐까.  전세계 인류에게 백신 개발이 화급한 과제가 되었다. 그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이제라도 자연 파괴를 멈추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코로나 와중에도 아파트 단지 전역에 쥐똥나무꽃이 활짝 피었다. 그 향기가 베란다의 두터운 유리를 뚫고 실내에까지 스며 들어온다. 작년보다 훨씬 탐스럽게, 더 많이 더 오래 피어서 향기를 멀리까지 날려보내고 있다. 코로나19로 각종 공장시설이 가동을 멈춘 이유라는 것같았다. 해마다 쥐똥나무꽃이 피어날 때, 나는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어린 딸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고향길을 달리던 故 xx대통령이다. 대자연의 일부같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쥐똥나무 꽃향기는 본래 그분의 향기였던가.

 

후손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인간과 자연이 동화되는 그런 삶으로 전환되는 대대적인 변혁의 때가 이른 것일까. 코로나19는 그 신호탄인가.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혁신과 변화가 아닐까. 끝모르고 치솟는 인간의 과욕을 폐기하는 날, 코로나19도 물러갈지 혹 모른다.

 

내년에도 더 먼 날에도, 쥐똥나무꽃의  은은한 향기가 변함 없기를,  투명한 연두색의, 순하고 달콤한 속살을 품은, 나이아가라 해변의 포도처럼, 맑은 바람, 맑은 햇살을 무한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202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