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남자

유쾌한 남자

능엄주 2015. 7. 29. 11:16

 밤새 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났다. 은혜의 얼굴이 부석부석하다.

은혜는 한 가지 일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숙면을 놓치고 만 것이다. 자연스럽게 잠이 쏟아질 때 하던 일을 놓아두고 얼른 자리에 누우면 그만인데, 한 페이지라도 더 들여다본다고 애쓰다가 그만 밤을 지새운 것이다.

 

몸이 천근이었다. 허리를 쭉 펴고 단 1시간이라도 잠 좀 잤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망을 접어두고

은혜는 오늘 공부할 과목의 교재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중국어 과문(課文)을 읽으라고 지명 받으면 해보는 수밖에.

그녀는 불안한 심정을 대강 얼버무렸다.

 

지하철역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공부한 내용이 중국어 쪽인지 고전 한문인지 너무나 바쁘게 지냈기 때문에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늦가을의 안개 자욱한 보도처럼 막막하기만 하다.

지하철은 몹시 붐볐다. 은혜가 책을 꺼내서 성조(聲調) 하나라도 더 연습해볼까 하는 간절한 희망사항을

실천해 볼 수 없을 만큼, 지하철 안은 병속의 메뚜기 꼴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열심파 - 공부벌레 들은 귀에다 리시버를 꽂은 채 의젓했다.

 

외국어를 숙달하기 위해서는, 더구나 중국어 공부의 큰 난제 중의 하나인 성조를 익히려면 지하철을 타고 가는

짧은 시간 역시 무척 소중하다. 구걸 바가지를 배 앞에 쑥 내밀고 찬송가를 들려주는 걸인 아저씨를 염두에 둘 경황도 없다. 은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했다.

 

은혜는 대범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태연한 체 눈을 감았다. 공부에도 자기의 분량이 있지. 뱁새가 황새 어떻게 따라가?

이만큼 하는 것도 장한데 하면서 은혜는 당치 않은 주장을 나름대로 읊어대고 있었다.

마침내 미아역이었다. 4번 출구 가까운 칸이어서 은혜는 잽싸게 층계를 뛰어올라 보도로 나갔다.

 

그때였다. 웬 남자가 회색 바바리를 펄럭이며 뛰어가더니 앞 서 걷는 사람을 붙들고 4번 출구를 물었다.

그 남자는 4번 출구로 나와 놓고서 4번 출구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동작이 번개 같고, 그 말소리가 어찌나 다급하던지

은혜는 그 남자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는 은혜보다 더 절박해 보였다.

 

“B 대학교 출석 수업에 가시는 거죠?”

은혜는 그 남자를 도와주자고 결심하고 중키 정도의 회색 바바리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가 4번 출구를 물으며 서두는 폼으로 봐서 오늘의 지역학교 출석 수업 수강생 일거라는 확신이 섰다.

“실례지만 무슨 과예요?”

출근 차량들이 소란스럽게 달리는 보도를 걸으며 은혜는 마치 〇〇일보 기자 초년생처럼 그 남자에게 연속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중문과예요.”

“몇 학년이신데요?”

“네? 저, 저요? 4학년이예요.”

그는 이 대답에서 약간 겸연쩍은 듯 웃음을 보였다.

“왜 하고 많은 과 중에서 중문과를 선택하셨어요?“

“재미있잖아요.”

 

은혜는 염치를 생략하고 궁금한 사항을 묻기로 했다.

혹시 은혜처럼 20대초에 중국어 공부를 한 경험이 있거나, 강제 결혼으로 그 공부를 중단했다든지 하고 추리력도 동원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은 조금 초점이 빗나간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새로 생긴 학습관 환경이 깨끗해서 좋다고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며 바쁘게 걸으면서 힐끗 바라 본 그의 얼굴은,

7,80 % 거의 ZHDNG GUO REN중국인(中國人)에 가까웠다. 가뭇한 피부가 그랬고 한국어 발음이 서툰 점과, 순박미가 뚝뚝 떨어지는 맑은 웃음이 아무래도 야박스런 도시인, 서울내기 하고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그 남자는 무엇 하나도 은혜의 질문을 허술하게 넘겨버리지 않고, 친절과 성의를 다해서 답변하는 것이 이 나라 이 땅의 사람 같지가 않았다.

 

“4학년이시라면 저에게 명함을 한 장 주세요!”

은혜는 두 어깨를 찍어 누르는 분량 많고 힘겨운 과제물의 중압에서 헤어나는 방법을 찾은 듯이,

4학년 선배님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외국어를 홀로 독학 하는 입장에서 보면 유능한 과 선배를 만나는 일은 대단한 행운에 속했으므로.

 

그 남자는 바쁜 걸음을 멈추고 큰 가죽 가방을 열더니 뒤적뒤적 한참이나 찾는 모습이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명함이 없다고 하면서 다음 기회에 주겠다고 하였다.

출석수업 시간이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은혜와 그 남자는 더 빠르게 달려갔다.

강의실로 정해진 그곳은 지하철역에서 꽤나 먼 거리였다.

 

“이건 도보 7분 거리가 아닌데요.”

앞서서 뛰어가던 그 남자가 말했다. 그 남자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강 물살처럼 퍼져 나갔다. 눈 빛 또한 형형(熒熒)했다.

“7분이라고 해서 지난번에 우리가 얼마나 헤맨 줄 아세요? 약도에 별 필요도 없는 북부교육청을 그려 넣어서 큰 길 놔두고

뒷골목에서 우왕좌왕 했다니까요.”

은혜는 많은 말을 뱉어내느라 더 헉헉거렸다.

 

은혜 걸음으로는 중키 정도의 회색 바바리를 입은 날렵한 남자를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

그 남자는 은혜의 걸음 속도에 얼추 박자를 맞추어 주는 눈치였다. 은혜가 뒤쳐지면 그 남자는 여러 차례 걸음을 멈추고 은혜를 기다려 주기는 했다. 은혜로서는 그를 따라가느라 그야말로 고꾸라질 상황이었지만, 바쁜 중에도 그녀를 기다려주는 그 남자의 갸륵한 배려에 감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드디어 미아 학습관에 도착했다. 자동문을 밀고 들어가 헐레벌떡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곧 문이 열리자 은혜는 재빠르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왜 안 타세요?”

은혜가 말할 사이도 없이 그 남자는 엘리베이터 반대 방향으로 갔고 은혜는 혼자서 4층으로 올라왔다.

이상했다. 혹 그 남자는 자기 강의실을 모르는가. 은혜는 이모저모로 궁리하며 복도 벽에 붙여놓은 출석카드에 출석 표기를 했다.

과목마다 자신의 이름자를 확인하는데도 손이 떨려 절절맸다.

 

넓게 트인 창으로 인수봉 봉우리가 보이는 401호는 앞자리 몇 개가 비어 있었다.

은혜는 앞자리 중앙에 앉아 책상 위에 교재와 필기도구 등을 꺼내놓았다. 수업 준비를 마친 다음 은혜는 고개를 들어

흑판 쪽을 바라보았다.

“앗!”

 

은혜가 짧게 소리쳤다. 피부가 가뭇한, 회색바바리의 그 남자가 흑판 앞에 엄숙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중어중문학과 4학년이라던, ZHONG GUO REN 을 닮은 바로 그 유쾌한 남자였다.

“어머머머… ”

순간 은혜는 그 남자를 향해 꾸벅 절을 했다.

 

그는 이 지역 소속 학생들을 가르치러 오신, 새로 부임한 중국어 교수님이었다.

본래 B 대학교란 곳이 교수님이 학생 같고, 학생이 교수님 같은 곳이긴 하지만 은혜는 어안이 벙벙했다.

당황한 은혜의 인사에 중국인으로 보이는 교수님은 선하고 맑은 미소로 답했다.

 

은혜는 이번 학기 출석 수업과 시험은 대체로 양호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과문(課文)을 읽으라고 하면 성조에 자신은 좀 없어도 씩씩하게 읽어야지. 은혜는 벅찬 기대로 교재를 펼친다.

가슴 가득 기쁨이 밀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