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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순이 생각/변영희

능엄주 2020. 4. 16. 21:55

오전 내 집안에서 뭉개다가 밖으로 나갔다. 근린공원이라도 한 바퀴 돌고오자 하고.

나가지 않는데에 익숙해져서 나가려해도 귀찮은 생각이 앞선다. 마스크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마스크를 쓰고서도 봄냄새, 꽃 향기 다 마실 수는 있지만, 마스크를 뚫고 새어나오는 입김에 안경 렌즈가 부옇게 흐려지는 건 성가셨다. 조금만 걸으면 땀과 입김으로 얼굴이 축축하게 습기에 젖는 것도 별로 느낌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가자. 오늘은 어디로 갈까. 나는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9~10단지 끝에서보다 여기는 가는 길이 여간 소란스럽지 않았다. 도로 양 쪽으로 각종 차량들이 씽씽 속도를 내서 달려갔다. 소음과 먼지가 깨름직하다. 그리고 웬 사람들이 거리에 그렇게 많은지, 코로나19의 준칙사항, 2M 사회적 거리를 유념하다보면 자유로운 산책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걸었다. 걸어야 산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5단지를 지나는데 5단지로 들어가는 길이 제법 그럴 듯 해 보였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그 멋있어 보이는, 아득히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였다. 금순이가 생각났다. S대학 입학에서부터 줄곧 붙어다니던 단짝 친구 금순이. 여름방학에 덕정 밤나무골에 가본 것도 금순이 덕분이었다. 밤나무가 그렇게 많은 마을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금순이는 삼선교 셋방에서 여고생 동생과 자취를 했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팔짱을 끼고서 사이좋게 개나리 동산으로 돌아다니며 마냥 즐거웠다. 학교에 좀 일찍 온 날은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처럼 잔디밭에 나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경쟁하듯 네잎 클로버를 찾고, 공부보다는 노는데 더 열심이었다. 평소에 책 붙들고 앉으면 해가 지는지 뜨는지 모르는 나에게 금순이를 만나고나서 이게 변화라면 큰 변화였다.


그런데 금순에게 남친이 생겼다. 첫눈에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였다. 귀골스럽고, 역시나 그도 금순이처럼 귀여운 형의 미소년이었다. 금순이는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팔짱은 고사하고 학교에 가도 같은 과목시간 외에는 얼굴보기가 어려워졌다. 금순네 자취방에는 그 귀골스러운 남학생이 드나드는 눈치였으며, 우리의 우정이 크게 벌어져 가는 게 실감났다. 나중에는 강의 시간에도 만날 회수가 더 드물게 되고, 마침내 금순의 자취방은 이사를 간다고 했다. 바로 그 남친의 집이었다. 남친의 부모님이 세를 놓은 집, 그 집을 비워 금순에게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친구 금순이를 만날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금순네 시골 집과 덕정의 밤나무 숲 추억도 아련해졌다. 그리고 금순의 약혼식, 이어서 얼마 못가 졸업 이전에 급 스피드로 결혼을 했단던가. 나중 들려온 소식이었다.


밤나뭇골 금순이는 부잣집 며느리, 부잣집 귀공자의 사모님이 된 것이이었다. 그후 금순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왜 5단지 숲길에 이르러서 금순이를 생각하다니. 스스로 놀라웠다. 그리 사무쳤던가. 그녀는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새도 없었단 말인가.  남친하고만 붙어다니다가  전격적으로 혼인까지 했으면서 왜 나에게는 아무런 기별도 하지 않았지? 본래 냉정한 친구였나. 배반이랄 거야 없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무척 섭섭했다. 밤나무 숲과 매미 울음소리, 그리고 골짜기를 흘러내리던 맑은 시냇물, 밭에 여기저기 딩굴어 있는 잘 익은 수박덩이를 따서 대청마루에 앉아 갈라 먹던 일. 금순네 집에서 보낸 그해 여름방학이 생각나다니 참으로 기이했다. 대체 이 친구가 한국에 살고 있기는 한 거야?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했다. 동명이인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아무리 검색을 해도 어느 포털에서도 내 마음 속의 금순이 그림자는 뜨지 않았다. 금순이를 검색하는 내 마음은 우정인가, 혹 질투인가. 대단한 가문의 며느리가 된 그녀가 어쩌면 이민이라도 간 것일까. 이민 가느라고 분주해서 미처 연락을 못한 것은 아닐까. 바람결에라도 소식이 있을 법한데 그녀도 나도 무심했던 것, 그 또한 희한했다.


5단지 숲. 내일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5단지 그 뒷산을 오를까 보다. 금순에 대한 더 절실한 기억을 이끌어낼 수 있게.

그렇다. 5단지 숲길을 먼 빛으로 바라만 볼 게 아니라 단지 뒷산, 그 숲길을 걸어보자. 맴! 맴! 맴! 어디선가 밤나뭇골 매미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2020.4.16.59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