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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친구와/변영희

능엄주 2020. 4. 15. 11:45

어젯밤 친구와 카톡이 오고갔다.

4월 15일은 대한민국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날 . TV 와 각 신문에는 총선 후보자의 홍보와 약력,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 별 실천성이 희박할 것 같은 허황한 공약들이 시간을 다투어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시간에 카톡을 주고 받은 것이다. TV 는 저혼자 떠들게 두고서 카톡을 주고 받느라고 스마트 폰에 코를 박았다. 친구는 '찍을 사람이 없다' 였다.


두 달 이상 바깥 출입을 통제해온 터라  외출이 새삼스럽기는 했다.

찍을 사람 없다고 집에 가만히 들어앉았을 것이냐. 그래도 찍으러 나가자. 사방에 봄꽃이 얼마나 좋은 줄 아니? 나는 친구가 찍을 사람 없어 투표장에 나가지 않을 것 같아 군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의 의지를 조금 더 굳건히 다졌다. 나도 여차하면 '하면 뭘 해' 하고 투표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이따금 소소한 지출을 위해, 그게 대부분 과일 종류와 새로 나온 싱싱한 봄나물이긴 해도 잠깐씩 마스크를 쓰고 나와보면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상쾌하고 즐거웠다. 어린애들이 한 시도 집에 붙어 있지 않고 놀이에 빠지는 이유가 집이 아닌  밖의 공간, 하늘과 구름을 볼 수 있는, 나무와 꽃들이 피어나는 자연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도 나가자 투표하러.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소중한 권리를 행사하러 가야지!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나는 며칠 전 유세 장면을 바라보면서 누구를 찍을 것인지를 분명히 해두었다. 딸의 의견을 넌즈시 물어보니 딸도 내 의견과 일치했다. 모녀의 의견이 일치를 이룬 것은 드문 일에 속했다. 그야말로 모처럼이었다.  세대간의 차이랄까. 음식문화에서부터 사고 영역, 행동 양식 등등, 서로  다름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가끔 그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충돌과 상충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나마 책을 보는 것은 대부분 같은 방향이라고 여겨왔는데 근일에 이르러서 딸의 독서하는 모습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가방에 묵직한 책 한 권씩을 꼭 넣고 다니며 지하철에서 읽는 것 같더니, 그리고 얼마 후에 보면 다른 새 책으로 변경되었는데,  웬걸. 딸의 가방이 대형에서 소형으로, 가벼운 것으로 바뀐 게 한참 된 것 같다. 책 대신 주전부리와 음료수, 요즘은 손 소독제와 물 티슈를 넣고 다니면서도 책을 넣는 것은 볼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정치. 거창하게 정치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뭣하지만 국회의원을 뽑는 일에서는 의견에 합일을 이룬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일치, 합일은 작은 아파트 안에서일 망정 좋은 조짐이었다.


친구는 나가기조차 삻다고 한 것이다. 그래도 찍으러 가자.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더 큰 불행을 야기할 수 도 있어. 눈 크게 뜨고 지켜보렴. 진실한 선량이 있기는 있어. 잘 찾아보라니깐. 그 숱한 얼굴과 얼굴 속에 반드시 숨어 있다니깐. 우리에게 부여된 귀중한 임무야. 나라를 지키는 일환, 한 역할을 우리가 감당하는 거라고. 되지도 않은 이론을 들먹이면서  설왕설래 끝에 우리는 투표장에 나가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외출용 구두를 꺼내 신은 것은 오랜 만이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의정치에 한 몫 한다는 자부심으로 씩씩하게 투표장으로 걸어갔다.

신선한 아침 공기가 반가웠다. 마스크를 쓴 다른 유권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온화함을 띨 수 있었다.

"언니!  투표하러 가는가봐. 나는 했어요!"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한 단지에 살면서도 얼굴을 볼 수 없었던 14층 젊은 엄마였다. 얼마나 반가운지 그러나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눈으로만 인사를 해도 처음 만날 때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일찍 투표하고 나오는 이웃 엄마를 만난 덕분에 투표 장소인  H중학교. 교정을 걸어가는 내 발걸음에  희망이 실린 느낌이 들었다.


모쪽록 사리사욕, 당리당략  말고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들이 당선 되기를 기원한다. 내 금쪽 같이 거룩한  한표가 그 밑거름이 되기를!  손 소독제로 거푸 손을 닦고 투표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한껏 가벼웠다.

친구야!  너도 투표장에 나왔겠지?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학교 담장에서 이제 막 봉오리를 터트리기 시작하는 연분홍과 진자주색 철쭉꽃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2020.4.15. 58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