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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염려 마/변영희

능엄주 2020. 4. 11. 02:58

글쓴이 : 변영희 날짜 : 09-12-01 20:18     조회 : 1863    
 
 


서울대학병원에서 검사를 일찍 끝낸 나는 마로니에 공원 주변을 흐르는 서울특별시와 종로구의 합작품  대학로의 '실개천'을 보러갔다.청계천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내린 사연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학로에도 시냇물이 돌돌돌 흘러가고 있었다.

한참 중국어 열풍에 빠져서  공부하러 이 길을 오가던 그 당시에는 프라타너스 그늘아래 벤치가 있었고, 오갈데 없는 노숙자들이 지저분한 이불을 온몸에 말고  대낮에도 누워있곤 했던 자리였다.비교적 인도의 폭이 넓은 탓인지 이불 말고도 시커먼 보퉁이며 간단한 취사도구도 있어 라면 정도는 그냥 그 곳에서  끓여먹는 눈치여서 그곳을 지나다니는데 거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숙자들이 여름철 숙소로 삼거나 취사 현장으로 삼았던 나무벤치는 간곳 없고 무슨 고산에서나 봄직한 기묘한 바위며 희귀 식물같은 화초 종류, 그리고 규모가 크지 않은 연못에는 작은 폭포가 있다.  물풀같은 것도 심어서 나름대로 도시의 품격을 격상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
대학로 실개천은 과거 북악산에서 성균관을 지나 대학로로 흘렀던 흥덕동천의 물길이 흘렀던 곳' 이라는 동판에 새긴 글을 읽고서야 이곳에 왜 실개천이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흥덕동천은 북악산의 남서쪽에서 흘러내려와 대학로를 지나 청계천으로 합류, 그 흥덕동천의 모습을 재현했다고 하는 설명을 읽으며  복원하고 재현할 것이 많은 서울 거리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 시냇물은 거의 서울대학교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가 있는 이화동 사거리까지 연결되는 모양이었는데  물이끼가 시퍼렇게 끼어있고 때가 겨울철이라 약간은 썰렁한 느낌을 주었다.
 
어느 해  늦은 가을 날  L선생님 일행과 대학로의 프라타너스 가로수길을 걷던 일이 생각났다. 넓고 길게 이어진 그 길은 둘씩 셋씩 걷기에 아주 좋은 거리였다.
"엄마 뛰어!"
갑자기 맑은 소리가 내 곁에서 울려왔다.
"야아! 그래 뛰자!"
또 한 소리가 신종풀루 방어용 마스크 착용으로 어눌해진 내 청각을 자극해왔다.
네살 정도의 여자 어린이가 엄마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는 게 보였다.나 역시 얼결에 그 예쁜 모녀의 뒤를 따라 파란 불이 한 개씩 줄어들고 있는 횡단보도를 향해 뛰었다.
"내가 일등!"
실개천이 있는 데서 반대 방향으로 건너온 여자아이가 두 손을 쳐들고 좋아라 한다.그들도 나처럼 실개천을 보러 온 것일까. 곤색 반코트에 스커트 그리고 검정색 머플러와 갈색 부츠 차림이 제법 폼 나는 어린 숙녀였다.
나는 그 모녀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길 위에 서 있었다. 횡단보도를 언제나 엄마와 딸이 함께 구호?를 외치며 뛰어가곤 했던 것일까. 엄마보다도 뛰는 솜씨가 빨라 보이는 어린아이가 불현듯 내 딸의 유년을 떠올리게 하였다.

경복궁엔 많은 관광객과 더불어 제00회 주부백일장에 참가한 전국  각처에서 모인 주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참가자 숫자가 불어나서 심시위원들은 예정된 시간에 심사를 마치지 못하고 1시간이나 연장했다.
딸아이는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엄마 손에끌려 거기 나온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를 좇아다니거나 경회루 연못에 잉어를 보면서 폴싹폴싹 잔디 위를 날아다니다싶이 하였다. 일본인 관광객인듯 한 남자가 그런 딸아이의 사진을 찍고 나에게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였다. 초록 원피스를 입은 딸애는 하얀 얼굴이 돋보였고 하얀 얼굴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그애의 밝고 환한 스마일, 웃는 모습이었다.

엄마들이 글 쓰느라 엎드려 있던 시간과 지연된 한 시간은 온전히 아이들의 시간이었는데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다가 그만 깜박 딸애를 놓치고 말았다. 유모차를 밀고온 젊은 새댁이며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 그리고 숱한 관광객들 속을 헤집고 다니며  "00야!" 를 목청껏 외쳤다. 주부백일장 결과를 보지 말고 일찍 집으로 갈걸 하고 후회도 되었다.
어디갔지?
대체 어디를 간 거야?
초가을 땡볕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연못 끝에도 가보고 화장실 근처에 가서 악을 써보고 두리번 두리번 사방을 훑어보아도 벨로아 초록 원피스를 맵씨나게 입은 여자아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 제 00회 '전국주부백일장' 심사발표가 있겠습니다."
행사장에 마련된 마이크가 조용히 자리에 앉아달라고 반복해서 말하자 나는 하는 수없이 내 소지품이 있는 의자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장려상부터 발표하기 시작하여 시부문과 산문 부문을 나누어 3등에서 부터 호명하였다. 심사발표를 듣는 등 마는 등 나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동서사방으로 눈을 돌려 딸아이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산문부 일등 000씨!
내 이름이 불려지는 것도 모른 채 넋이 나간 상태로 멍청히 서 있을 때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수런수런 이상한 기척이 났다.
"네!"
하는 소리와 함께 튕기듯 나타난 것은 초록 원피스의  5살 어린아이, 바로 딸아이였다.
딸아이는 쪼르르 미끄러지듯 단상 앞으로 달려나가며 엄마가 어디 있나 찾는 기색이었다. 모든 눈길이 딸애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황망중에 앞으로 주춤주춤 걸어나갔다. 사람들이 힘껏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는 상장과 상품을 받아들고 딸의 손을 잡고 내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자리에 앉고나서도 나는 흥분을 갈아앉히지 못했다.

대학로에서 만난 어린 여자아이와 내 딸을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은 흐뭇함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기쁨들이 어찌 딸의 어린 날에나 국한하랴.
이제 소망하기는 엄마를 염려하지 말고 딸아! 너만의 행복을 찾아 길 떠나기를 빈다. 결혼 상대자는 60점만 넘으면 합격이야. 아니 원래 100점은 없는 거란다.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거지. 엄마는 염려 마. 엄마는 언제든 책상 앞에 앉을 수만 있으면 만사오케이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적어도 "엄마를 부탁해" 라고는 피차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무슨 물건이냐, 어디다 뭘 어떻게 부탁할 건데.
엄마의 자존심이 혼자서 독백하였다.
.
그 모녀를 만남으로하여 대학로 실개천 나들이는  성공적인 산보코스가 된 셈인가. 오늘의 검사 내용이 별탈 없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나는 즐거이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임병식   09-12-01 21:02
이 작품은 콩트이겠지요.
상상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어서 따라 읽으며
숨이 가빠 혼이 났습니다.
건강하심을 글을 통해 확인하고 갑니다.
 

 
변영희   09-12-01 22:05
TV에서 [천사의 유혹]  재미있게 보면서, 대학로 실개천 생각이 오락가락.
선생님께서 제일 먼저 제 글을 읽어주셨네요.
이글 완전 사실이에요. 당시 주부백일장에는 아기들이랑  엄마랑 같이 온 경우가 많았어요 어느 해인가는 제가 시골 동네 엄마와 애들 한 소대를 끌고왔어요. 서울 경복궁 구경 싫컷 하고 상도 타고, 주머니가 허술해 겨우 크림빵이나 사서 쪼개먹으며 그래도 신났지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박영보   09-12-02 01:20
이곳 저의 집 가족은 삼남 일녀로 구성이 돼 있습니다. 저 자신과 두 아들에 여자라고는 육십이 넘은 마누라 하나 뿐이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 여자, 얼마나 도도한지 모른답니다. 집안의 모든 일은 그사람의 입맛대로만 요리가 돼가야만 집안이 조용해 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지요. 그 고집은 아마 하나님도 말리지 못하실 것입니다. 손녀라도 있었으면 했었지요. 큰 녀석이 결혼한지 삼년이 돼 갈 무렵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지 뭡니까. 변영희 선생님의 그런 따님과 같은 손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변영희   09-12-02 10:03
박영보 선생님 감사합니다.
딸만 셋인 집안에 외손자 둘 태어나니 그제서야 그댁 할아버지 어깨에 힘 생겼다나요. 아들을 둘이나 낳은 딸에게 그래도 또 딸하나 더 낳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댁 할아버지 딸 셋 키우던 재미 못잊으신건지.ㅎㅎㅎ
선생님께서도 예쁜 손녀 더 기다려 보시지요.
희망이 있잖습니까.하하
 

 
임재문   09-12-02 02:20
주부백일장 일등! 그 일등!이 모녀상봉이네요 ㅎㅎㅎ 생각만 해도 가슴뛰는 일등! 또 그 덕분에 찾고 있던 딸을 상봉하는 모습이 눈에 어리어 옵니다. 서울구경하고 싶어지내요 ㅎㅎㅎㅎ
 

 
변영희   09-12-02 10:09
임재문 선생님

저가 요즘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손을 못대면서 자꾸 외도를 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세월은 가는데 벌써 12월인데 그만 헤매야 하는데....괴로운 심정.
주부백일장 그 때는 참 좋았어요. 시골사는 엄마들과 서울로 원정가는 재미. 몇 년만에 서울온 다른 엄마는 글은 안쓰고 애들 건사도 안하고 사람구경 서울구경만.
고맙습니다.

 

 
이희순   09-12-02 10:24
이 땅의 어머니들을 향해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결코 '어머니'는 아닐 것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고려장을 바라시는 어머니의 속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변영희   09-12-02 12:56
얼마전에 어머니, 즉 문학작품 속에 투영된 어머니에 대해 심포지움이 열린 적 있어요. 한국에서 특히 어머니라고 하면 '약자 희생 봉사 무조건 퍼주는 사랑  하소분단지 '등 한 인간으로서의 어머니는 전혀 논하지 않는 게 관행이랄지. 그 심포지움에서 단 한 분이 다른 견해를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 분이 무척 돋보였어요. 다른 시각으로 본 분은 그분  뿐이었던 것 같아서요.
어머니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도 조명이 필요할 듯.
 

 
이덕영   09-12-02 11:22
"엄마는 염려마" 라는 긍정의 언어를 통한 외침  혹여 외로움의 절규로 들려옴은 왜일까요.  "엄마를 부탁해" 라는 말은 하지 말자는 다짐의 언어가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군요. 변선생님 건강관리 잘하세요.
 

 
변영희   09-12-02 13:03
외로움?
선생님 그런 류의 외로움은 외로움의 범위에 포함 안시켜도 돼요.
외로운 사람은 오히려 외로운 게 축복일 수 있어요. 뼈가 저리도록 외롭게 두어야 해요.
서뿔리 외로워가지고서는 아무 것도 못 이루어요. 
궤변인가요? 하하하..
선생님 감사합니다.
 

 
최복희   09-12-02 20:07
미소 지으며 가볍게 글을 읽어가다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고 예쁜 따님에게 무슨 변고라도?
아니면 선생님께?
산문 부문 1등!
따님과 상봉!
환희!
그리고 묵직한 모정에 가슴 뭉클!
외로움을 축복처럼 안고 문학으로 승화 시키시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인생!

짧은 글에서 인생의 생사고락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실개천이 흐르는 대학로도 가봐야겠군요.
고맙습니다.
 

     
변영희   09-12-04 08:10
대학로 실개천을 따라 걸으며
그리고 예쁜 모녀를 바라보면서 옛 생각을.
작은 생명의 귀함과. 사랑스러움을 보면서 내 딸의 어린 날을 추억.
고맙고 감사합니다.
 

 
일만성철용   09-12-02 23:19
딸과의 이별과 만남의 극적인 재회가 주부 백일장 발표로 연결되는 것이 아주 극적입니다.
글 재주가 인정 받는 장면은 부럽구요. 저는 글을 재주 아닌 노력으로 쓰는 사람이거든요.
 

     
변영희   09-12-04 08:12
선생님
쉬지 않고 산행하시면서 쓰시는 글 과연 일품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가 한없이 矮小하게 보일 정도로요.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이진화   09-12-02 23:51
아름다운 회상입니다.
그 추억이 읽는 이의 마음도 벅차게 합니다.
1986년 주부백일장에 참석했던 날이 기억나네요.
참 많은 시간이 흘렀고, 당시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던 문인들의 모습이 스쳐갑니다.
모윤숙 선생님, 한무숙 선생님, 조경희 선생님, 윤남경 선생님, 김자림 선생님...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원로 문인들을 가까이 뵙고 설레는 마음으로 단상에 오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제 어른이 된 따님도 좋은 추억 공유하며 늘 행복하기를 빕니다.
 

     
변영희   09-12-04 08:21
그래요. 강신재 모윤숙 박화성 임옥인 한무숙 선생님 등등.
그리고 조경희 선생님과는  당선자 몇 명과 함께 KBS에 출연한 일. 그 자리에서 조경희 선생님 저에게 소설쓰라고 하신 말씀. 청와대로 육영수 영부인 뵈러 간 이야기 등.
그 시절 주부백일장은 추억할 게 많군요.
이진화 선생님께 감사 드리며.
 

 
박원명화   09-12-04 21:39
잠시 짧은 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선생님의 필력이 날로 좋아져 이제는 끝까지 읽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습니다.
물 흐르듯 한다는 산문의 기본 정신이 다 모여 있기에 독자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변영희 선생님의 예쁜 따님도 이젠 엄마가 되었을터이고 아마도 그때의 엄마 모습을 그리며 엄마처럼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변영희   09-12-04 21:52
엄마 염려말고 저나 가주면  "엄마는 염려마"  가 안 나올텐데
"딸은 염려마"  하고 싶은 건지. 지가 무슨 엄마의 구원병 보호자인 것처럼..
주부백일장에 가서도 신나게 돌아다니다 언제 지엄마 이름은 외웠는지 마이크가 호명하니까 번개같이 나타났어요. 동네 이모들이 깔깔깔....그자리에 모인 엄마들이 모두 눈을 휘둥글....야가 바야흐로 등단한다고 하네요.지켜봐 주세요.하하하
.
 

 
정진철   09-12-11 21:35
모녀는 용감하였습니다~ㅎㅎ
주부 백일장 일등도 대단 하시고
그런 엄마에게 극적인 상봉의 모습을 연출한 어린딸의
기지또한 대단하고 용감한 모습들이었습니다~!
 

     
변영희   09-12-12 17:25
까치가 우리나라에선 길조라고, 아침에 까치가 깍! 깍!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고 하는 이야기 들어 보셨나요? 근데 그 까치가 어느 둥구나무로 날아갔나. 치악산 금강송 소나무 위에 앉아 있나. 궁금했지요.
느닷없이 나타나셨네요. 까치처럼.

 

 

출처 :변영희  제4수필집 수록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