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주유천하 (155)전염병과 십승지(十勝地)
십승지, 전쟁·기근·역병 등 삼재 들어오지 못하는 지역
선조들 오랜 경험 통해 추려내
사람 접근 어려운 ‘오지’지만 자급자족 가능한 특성 지녀
한국은 난리가 나면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다. 임진왜란 때도 임금은 백성을 팽개치고 평양·의주로 도망갔다. 마지막에는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피신하려고 했다. 죽어나는 것은 민초들이었다. 한국전쟁 때도 서울 사람들이 피난조차 가지 못하게 한강다리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도 집권층은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 안심하라’는 거짓 방송을 내 보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도 그랬다. ‘괜찮다. 문제없다’고 했지만 결국 파탄 났다. 혼란이 오면 각자가 알아서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십승지(十勝地)다.
삼재(三災)가 들어오지 못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열군데가 바로 십승지다. 삼재는 전쟁·기근·역병이다. 십승지로 숨어 들어가면 전쟁이 나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사람이 굶어 죽는 대흉년에도 살 수 있으며 전염병이 창궐해 길거리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데도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훑어보면 영조 26년, 1750년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했다. 1월부터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해 3월 무렵엔 사망자가 10만명에 육박했다. 7월까지 전국에서 죽은 숫자를 대략 계산해보면 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영조 임금 당시 조선의 인구는 700만명 정도였다. 이중에서 20만명이 죽었다고 추산하면 그 사망률은 상당한 비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그리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심심산골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곳이 십승지에 해당한다.
조선 팔도를 다 뒤져 그 가운데 가장 숨기 좋은 지점을 열군데로 추린 셈이다. 그러니까 이 십승지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게 아니고 적어도 오백년 이상 목숨 보존처를 찾아 헤매던 낭인들과 떠돌이 민초들, 그리고 깊은 수도처를 구하던 승려와 도사들의 현장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십승지는 어디인가? 경북 영주 풍기의 금계포란, 봉화의 춘양면, 안동의 화곡, 경남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강원 영월의 정동쪽, 충북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 근처, 단양의 영춘, 충남 공주의 유구와 마곡, 전북 부안의 호암(壺岩),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이다. 십승지는 국가조사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지정된 곳이 아닌 <정감록> <남사고비결> 등 각종 민간 비결서에서 주장하는 곳들로 비결서마다 약간씩 들쑥날쑥하다.
지리산 일대에 산재한 청학동 서너군데도 십승지의 연장선상이다. 오히려 십승지보다도 훨씬 일찍부터 난세에 몸을 보전하고 신선도를 닦을 수 있는 명당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한문 서당이 있는 청학동, 하동 쌍계사 뒷길로 30분 정도 올라가면 있는 불일평전(佛日平田), 해발 700m의 고운동(孤雲洞), 칠불사 위에 있는 허북대(許北臺) 같은 곳도 청학동 범주에 속한다.
십승지의 특징을 다시 꼽아본다면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라는 점, 외부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자그맣지만 최소한으로 먹고살 수 있는 전답이 있다는 점이다. 숨어 살더라도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밭뙈기 몇마지기라도 있어야 한다. 십승지는 대개 이런 조건이다. 이는 한반도의 7할이 산이라는 지형조건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 산들은 해발 1000m 내외라 동식물이 살 수 있고, 계곡물이 흐르며 숲이 우거져 있다. 물이 없고 동식물이 없는 산에는 사람이 숨어 살 수 없다.
유럽의 그리스나 터키, 중동에 가보면 산은 있지만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물도 거의 없고 나무도 없다.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 척박한 황무지 산세를 가진 곳에서는 십승지가 만들어질 수 없다. 산으로 들어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환경이 펼쳐진다. 터키에는 ‘데린쿠유’라고 해서 땅을 파내 만든 지하 10층 규모의 지하도시가 있다. 돌이 물렁물렁한 석회암으로 돼 있어 땅굴 파기가 쉬운 지역이라 박해받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십승지가 됐다. 1만명 이상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난리가 나면 산으로 도망갈 수 없으니 땅속으로 굴을 파고 숨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사람이 모인 곳일수록 돈 벌기 좋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면 사람 없는 곳이 좋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미국의 LA나 뉴욕이 한국인에게 십승지였다면, 미세먼지와 너무 치열한 생존경쟁에 지친 2000년대에는 자연환경이 좋은 호주나 뉴질랜드를 십승지로 여긴다. 토종 십승지가 그립다.
조용헌은…
▲강호동양학자·불교학자 ▲저서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휴휴명당>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