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책을 쓰는 일은 어쩌면 오자와의 전쟁인지도 모른다. 전쟁이란 말이 너무 살벌하거나 과하다면 싸움이라고 고쳐 부를까. 전쟁이나 싸움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여튼 전쟁이든 싸움이든 그 어휘에 대한 표현이야 어찌 되었든 내가 말하려 하는 것은 그들 어휘가 아니라 오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글을 쓰다보면 스토리의 흐름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의도한 대로 ‘자연스럽게, 독자들이 잘 읽을 수 있도록 어색하거나 어렵지 않게’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스토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오자다. 문장을 다 써 놓고 수차례 수정을 해도 나오고 또 나오는 게 오자라고 할 수 있다. 스토리 흐름을 따라 줄 줄 읽다가 뭣에 걸린 듯 멈칫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오자일 경우가 많다.
그것도 오자가 나오기 쉬운 그런 오자일 때는 ‘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가볍게 넘어간다. 그런데 도저히 오자가 나와서는 안 되는 글자도 더러 있다. 그 글을 집필한 작가나 출판사의 수준이나 안목이 의심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무슨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은 오자가 전무하다거나, 활자가 특이하고 읽기 좋다거나, 혹 편집진이 우수하다는 평을 들은 일이 있다. 그 말의 진위를 캐려는 건 아니지만 워낙 지명도가 높고 늘 판매실적 베스트를 점유하는 출판사의 책을 독자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이 선호하고 사게 된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자가 없었다. 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아서일까. 적어도 곰곰이 읽은 그 책에서는 오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자에 관 한 한 무척 예민한 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어느 교수님댁의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초등학교 2년생의 가정학습 외에 그 댁 가장인 S 대학 교수의 저서, 원고를 수정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교수의 주변 사람들의 저서까지 확대되어 그 일만으로 한 학기 등록금을 거뜬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오자에 대해 그분들을 번거롭게 한 일이 없고 늘 칭찬과 후한 보수를 받았다. 나중에는 그것이 발전하여 아버지의 사후에 생업이 된 일도 있었다.
요즘에는 교정 방법이 전과 많이 달라졌고, 컴퓨터의 맞춤법, 빠른 교정으로 보아도 애초 맞게 쓴 것도 이상하게 변질되는, 전혀 얼토당토한 단어로 둔갑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렇다할지라도 교정 수정은 소홀히 할 수 없다. 한 권의 책, 한 문장을 쓰더라도 국어대사전, 한문사전, 옥편, 영어사전, 중국어사전 온갖 사전류가 등장하기도 한다.
근래 나는 오 ‧ 헨리의 대표적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을 인터넷 실버넷뉴스에 올렸다. 물론 여러 번 교정을 거쳐서 올린 것이다. 그게 여러 날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다가 어제서야 드디어 등록 완료되었다. 아마도 문화관 관장이 기왕이면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그걸 올릴 심산이었던가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올라온 오‧ 헨리의 단편소설을 다시 읽었다.
아니 이게 웬일? 왜 진즉에 안 보였지? 이럴 수가! 오자(오타)는 나를 몹시 부끄럽게 했다. 얼마 전 어떤 분의 저서에 추천서를 쓰고 그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자를 출간 후 발견하고 말씀드린 일이 있었다. 오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고치고, 오자가 나면 책의 품격이 떨어진다며 질색하는 성미인데 이번엔 틀림없는 내 실수였다.
뉴욕에 갔을 때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캐나다 공항에 내리는 한국인들 보면 단박에 표가 난다니깐. 서울에선 최고의 패션인지 모르지만 너무 촌스러워!” '유명 브랜드 옷을 폼 나게 떨쳐입고 카트를 끌고 출찰구로 나오는 이들은 거의가 한국 사람이라고, 미국에서는 보통 청바지에 재킷 하나 걸쳐도 절대로 기죽거나 초라하지 않은 문화'라고 이야기했던가. 큰 물, 큰 무대에 나가면 금세 눈에 띠는 촌스러움. 내 P C에서 더 큰 광장으로 나아간 원고가 정식으로 등록이 완료되고서야 그 오류가 발견된 것처럼. 글 쓸 때 더욱 정성스럽게 원고를 살펴 볼 것을 다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