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이 있는 그곳
-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어린 시절 우리집은 꽃이 많아 꽃집 딸이 많아 딸 부잣집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상 자주 집을 비우셨고, 돌아올 때는 그 당시 별로 만나 볼 수 없는 진기한 것들을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에게 선물하셨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이라면 어머니와 큰 언니에게는 향기 나는 화장품이었고, 형제들에게는 신발과 옷 외에 더러 부시럼, 눈병에 유용한 연고, 의약품 같은 것들이었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아버지의 귀가는 곧 집안 잔치를 연상할 만치 신나고 행복한 행사로 기억된다. 형제들이 각기 노래와 율동으로 장기자랑을 펼쳤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매일 일기를 썼고 서툰 솜씨로 글을 지어 가족들 앞에서 낭독했다.
작은 오라비는 그 밤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느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매우 들떠 있곤 했다. 드넓은 대청마루는 작은 오라비의 엉성한 무대장치가 어우러져 부엌에서 올라오는 맛있는 요리냄새와 함께 어린 동생들을 환상의 나라로 유인했다.
6뤌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 온가족이 꽃밭에 둘러앉았을 때 갑작스럽게 6.25가 발발했다. 38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집의 평화와 행복도 처참하게 무너져갔다. 출장 중인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이웃들은 살림살이와 어린 것들을 이고지고 피난을 갔다. 거리 곳곳에 전쟁의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더 기다리지 못하고 어머니가 허둥지둥 아이 7명을 거느리고 어스름 달밤에 무심천 모래밭 길을 걸어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였다.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밤새도록 총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〇〇대통령의 명령으로 보도연맹원을 수색하여 처형하는 소리였다고 했다. 전쟁의 암운이 코앞으로 점점 다가왔다. (中略)
친구 부모님의 배려로 안정되고 화평한 환경 속에서 여고를 졸업하던 그날, 나는 군에서 휴가 나온 큰 오라비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서울로 갔다. 조용한 소도시의 교사가 되고 싶었던 나는 내키지 않았다. 가족 모두 진즉에 서울로 거처를 옮긴 상태에서 나 혼자 청주에 머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또는 학교 밖에서 이유 모를 불이익을 당할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무수히 원망했다. 혼자 놔두어도 모범적으로 잘 해나갈 수 있는데 낯선 서울로 굳이 나를 불러들이는 것도 반대였다. 부모님과 큰언니를 비롯 두 오라비 모두에게 고향 청주는 이미 원한의 땅이 되어 있는 사실을 나는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6.25는 고향을 떠나게 한 직접 동인이었고, 부모님이 고향을 등져야 하도록 핍박을 가한 형벌의 도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할아버지가 계셨던 무심천 둑길 그 너머에 있는 용화사에도 가보고 싶었고, 청주여중 문예반 시절 글짓기하던 서공원에도 올라가고 싶었다. 무심천변에 흐드러지던 벚꽃 행렬과 초중고 소풍 때마다 갔던 명암방죽, 가재가 기어다니는 보살사 맑은 개울도 그리웠다. 그래서일까. 내 글 속에는 언제나 청주에서의 사연들이 등장한다. 아름답고 즐거운 시절이야기보다 슬프고 가슴쓰린 이야기를 엮을 때 나는 목이 멘다. 매년 백중절에는 비명에 가신 부모님과 형제들 넋을 위로하는 재를 올린다. 내 방식의 효도요 참회다.
소설 작품 편편에 펼쳐지는 고향 이야기는 내 목숨이 다하도록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내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고 싶다. 시대적 역사적 트라우마, 우울증에 시달리다 비명에 간 가족들, 상처 입은 내 영혼의 치유를 위해서도 어릴 적 고향집을 재현하고 거기 머물러 대작을 쓰고 싶다. 그곳이 나의 영원한 글 샘이지 싶다. 내가 어기차게 글을 쓰는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나는 아쉽게도 우수상에 머문 [무심천에서 꽃핀 사랑]보다 더욱 멋진 소설을 쓰기위해 분발할 것이다.
서푼어치도 유익이 없는 전쟁으로해서 강산이 다시 황폐해지지 않기를 빌며.(끝)
<문학의 집 . 서울> 제220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