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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가져다주는 선물 /김 영 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변영희 퍼옴

능엄주 2020. 1. 24. 10:31
여행이 가져다주는 선물
김 영 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가을이다. 적당한 바람에 적당한 볕, 늘 이맘때면 각종 여행정보들이 눈과 귀를 자극한다. 예나 지금이나 ‘여행’만큼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여행의 이유는 사람마다 처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내면의 출발은 거의 비슷하다. 여행을 하고 싶은 욕망 깊숙한 곳에는 ‘지금의 일상에서 벗어나기’와 ‘낯선 것에 대한 동경’이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 삶이 지칠 때는 더욱더 내가 사는 공간 밖으로 나가 다시 내 안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사람들의 바램이다. 그 연원은 참 오래되었다. 그러나 여행이 늘 뜻대로 되기는 어렵다. 여행자를 철저하게 ‘수요자’로 파악하여 제공되는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사실 애초에 기대했던 여행의 의미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소비의 패턴을 따라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조선 지식인, 지도 위의 세계여행

  각자의 사정에 따라 실천 여부는 다르다고 치더라도, 해외여행은 이미 지금의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하게 다가와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만큼 나라 밖의 낯선 풍경들을 접할 수 있는 편의가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긴 역사 속에서 살펴본다면 불과 2,3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는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해외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란 사절단을 따라 중국이나 일본으로 들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그마한 조선 땅을 벗어나 미지의 장소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 지도 위의 상상 여행, 그것이었다.

  16세기로 들어서면서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 등 서구식 세계지도와 각종 지리서가 유입되기 시작한다. 지구가 둥글고 그 어느 한 점도 절대적인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작은 방에서 글공부만 하던 책상물림들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 낸다. 조선 후기 중인 지식인이었던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도 방여승략(方輿勝略) 이라는 지리서를 접하게 되었다. 이 지리서에는 중국 이외의 여러 나라들의 문화가 담겨 있다. 그는 책 한권이 주는 상상 여행의 기회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근래에 정백이씨가 편찬한 방여승략을 얻었다. 중국 전체를 낱낱이 열거하고 천하를 그려낸 것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특히 「외이」열전은 먼 지방의 중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열거했다. 기뻐서 내 스스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이 몸에 날개를 달아 그곳까지 날아가 이 책과 같은지를 살펴볼 수 있을까’ 그러다가 잠시 후 또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몇 리나 될까. 그럼에도 나는 아직 다 보지 못했거늘, 어찌 광막한 세계를 그리워하며 헛수고한단 말이냐...하고 싶은 말은 우선 글 상자에 집어넣고, 내 평생 멀리 돌아다니고픈 뜻을 적어본다.”

  날개를 달고 날고픈 열망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그대로 그 꿈을 접기에는 아쉽기에 가슴으로 여행을 하고, 시로써 풀어낸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하던 여행법이다. 필자는 추재와 같은 중인들을 통해, 지금 이 시대 소시민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눈에 보이는 신분제도는 없다하더라도 자본의 논리에 의해 우리는 충분한 박탈감을 지니고 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욕구, 다른 곳에서 다른 나가 되고 싶은 욕구를 모두 충족 시켜줄 수 있는 여행의 꿈은 예전과 다름없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여행은 발전과 창조를 낳는 산파

  호기심, 상상력과, 도전, 열정 등은 여행에 동반되는 말들이다. 담헌과 연암을 위시한 북학파 문인들에게 있어 중국 북경이라는 해외 체험은 그들의 열정을 자극했다. 이는 책을 통한 지적 자극과는 또 다른 것이다. 오감(五感)으로 접한 선진 문물, 제도 등은 낯설면서도 그들의 열정과 도전에 힘을 주었다. 늘 있던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여행은 처음으로 목도한 풍경을 두려워하면서도 수용하게끔 만드는 마력이 있다. 즉 새로운 장소에 임할 때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게 만든다. 새로운 인식은 또한 그간 너무 습관이 되어 있기에 자각하지 못했던 불합리한 현실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연암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 이희경의 「설수외사」 등은 여행이 낳은 발전과 창조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책상 앞에서 혹은 누워서 즐기는 와유(臥遊)이던 직접 발을 내딛던 간에 여행의 방법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손만 뻗으면 너무 쉽게 상품처럼 즐기는 여행에서 벗어나, 어렵고 길더라도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을 돌아보려 했던 조선 지식인의 느린 여행법을 배우고 싶다. 아이들의 교육에 여행이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한다. ‘생각하며’ 여행하는 법을 알려준다면 이 역시 더 없는 선물이 아닐까.

글쓴이 / 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성균관대 한문학과 강사
논저 : <추재 조수삼의 연행시와 「외이죽지사」>(2008)
         <조선 후기 죽지사를 통해 본 18,19세기 중인층 지식인의 타자 인식
         -조선 후기 서리 출신 추재 조수삼의 작품 연구를 중심으로->(2011)
         <19세기 중인층지식인의 해외체험일고>(2011)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1~3>, 전통문화연구회, 2011 (공역)
         <열하기행시주; 열하를 여행하며 시를 짓다>, 휴머니스트, 2010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