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실 파티
‘시는 밥도 아니며 돈도 아니고 칼도 아니다. 그것은 따뜻하게 폭발하는 추억들, 바람의 경전經典, 기억의 간선도로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인서安仁瑞는 읽기를 멈춘다. 《풍경의 탄생》을 쓴 저자가 몹시 궁금했다. 저자는 시로, 혹은 그와 관련한 글을 써서 일정부분 목표? 글쎄 어감이 이상한가. 목표를 달성한바 있고, 현재도 왕성한 필력을 구사하고 있는 성공한 문필가군에 속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이 시인은 이렇듯 오만한 문장을 콸콸 뱉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밥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칼도 아닌 시,‘따뜻하게 폭발하는 추억’을 그 시인은 그의 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이 체험했단 말인가. 목표 또는 성공이란 것은 문학과 경제적 측면 두 가지 각도에서 이해해 볼 수가 있을까.
잡념 떨치고 본문으로 돌아가라, 배 아픈 증세를 잊기 위해서라도 글자 한 자 한 자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라. 글이 품고 있는 의미를 꿰뚫어야 한다. 인서는 내면의 소리에 이끌려 책으로 신경을 집중시킨다.
그녀의 눈이 간신히 원 위치로 되돌아오는가 싶었다. 곧 다시 눈길이 엉뚱한 구석을 배회한다. 정신집중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른 새벽 세수하면서 빨아 널은 하얀 손수건.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거기 머문다. 흔들리는 것은 시선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귀의 화살을 맞은 듯 오른 어깨가 결린다. 인서는 이곳 토지문화관에 온 후 주로 책만 읽었다. 물론 워드작업도 하긴 했다. 그 정도의 노동으로 어깨가 몹시 아프다는 건 이유가 안 된다.
그녀의 눈길이 손수건에 한동안 고정된다. 가로 세로 40~50 센티가 겨우 될까 싶은 사각 손수건에서 반짝 빛이 난다. 초록 들판에 내려앉은 백학인가. 손수건의 강렬한 하얀 빛이 눈부시다. 그 새하얀 광채가 그녀의 내심에 콕! 박힌다. 하얀 손수건에 시를 적어 그리운 이에게 전하고 싶다. 독서 중에 쓸 데 없는 사념은 멈추어라. 다시 또 하나의 인서가 출현하여 엄히 나무란다.
인서는 얼른 시선을 거두어 책으로 가져온다. 이번엔 향기가 따라왔다. 풀 향기였을까. 매지리 골짜기에 첩첩으로 숨어 있던 산정기일까. 연원을 알 수 없는 소소하고 미미한 향훈, 활짝 펼쳐도 얼굴의 도드라지고 움푹 들어간 윤곽을 겨우 가릴까말까 싶은 작은 손수건에서 비롯한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대지 깊은 데서 길어 올린 물 향기일 가능성이 높다. 오봉산에서 내려온 맑은 바람일수도. 인서의 하얀 손수건이 토지문화관의 자연풍물과 함께 연출하는 요술일 터. 집에서는 단순히 하나의 손수건에 불과했다. 이웃친구가 종이 휴지를 될수록 사용하지 말라며 인서에게 준 것이었다.
인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 앞으로 다가선다. 창밖은 온통 초록 세상이다. 비 때문에 푸른빛이 두드러진다. 옷걸이에 걸쳐놓은 손수건을 걷었다. 손 안에 쥐자 살포시 구겨지는 음감이 상쾌하다. 인서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볍게 두들긴 후 목에 감는다. 인서는 작은 동작으로 배 아픈 것을 잠시 잊는다.
‘소설이라는 파이는 현격하게 작아졌다. 그런데 이 작아진 '파이' 에 너무나 많은 소설가들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달려들고 있다.’
고픈 배라고? 인서가 보기에 조금 무엄하다. 하긴 소설 쓰는 이야기가 언제 한 번 제대로 삶의 윤기를 담아 본 적이 있던가. 하지만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소설 비관론인가, 호된 질타인가, 죽기 살기로 창작에 매달려도 한 달에 〇만원 벌기도 어렵다는 이야기가 신문을 장식한 일이 있다. 공개적으로 소설가들의 궁핍을 홍보한 기사에 다름 아니었다. 인서는 책을 보면서 민낯으로 소설가들의 가난한 일상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것은 바로 인서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얼굴은 그 이면에 숨은 욕망, 내적 기질, 외상성 기억들, 삶의 고단한 역정들을 드러낸다. 본디 얼굴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나날의 삶과 함께 새로 쓰여지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얼굴에는 삼라만상이 내비친다. 관상술이란 얼굴에 떠오른 천기天氣와 운명을 읽어내는 비술이다.’
이건 혹 관상학적 글인가. 우리 모두의 얼굴에도 위에 든 항목들이 무시로 표출되고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쓰여지고 있을 게다. 얼굴을 보면 천기와 운명이 다 보인다고? 이론치고는 좀 괴이쩍다. 하긴 40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인서는 그 즈음에서 책을 덮는다. 아침밥을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인서에게는 아픈 배가 있고 고픈 배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초록 들판의 백학 한 마리, 백학도 초록 들판에 먹이를 사냥하러 온 것일 게다. 책 읽는다고 아침 식사를 거르지는 말자. 하얀 손수건이 일깨워 준 진실이었다.
인서는 소형 냉장고에서 햇반 한 개를 꺼낸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 마침 외출하는 옆방의 동화작가가 사다 준 비상용이었다. 햇반은 이미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는 하얀 손수건을 목에 두른 채 햇반을 데우러 휴게실로 간다. 이곳에 온 며칠 동안 인서는 매사 서툴기도 해서 제대로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입소한 날이 연휴였고 그리고 비는 그 후에 계속 내렸다.
휴게실 문을 열자 렌지 앞에 몇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오는 날 그들도 배가 고프구나 싶어 인서는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어서 오세요! 우린 다 됐어요! ”
누군가 말한다.
“고마워요. 저는 식당으로 가는 게 낫겠는 걸요.”
인서는 그들을 일별하자 아침 메뉴를 햇반에서 식빵으로 변경했다.
“그러실래요? 우린 간단히 때울 참이었죠.”
인서는 숙소로 가서 햇반을 냉장고에 도로 집어넣었다. 대신 우산을 펼쳐들고 층계를 올라갔다. 비는 다소 뜸해져 있었다. 본관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은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아 다행이었다.
식당은 한산했다. 비오는 아침, 다른 이들은 늦잠을 즐기거나 방에서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혹 밖으로 외출했는지도.
“어서 오십시오!”
인서와 같은 날 입실한 K작가가 H시인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서를 반갑게 맞이한다. 인서가 머물고 있는 귀래관과 그들의 매지사와는 반대 방향으로 거리가 떨어져 있어 식당에 와야 서로 대면할 수 있었다.
“여기 오니 뵙는군요.”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인서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빵을 굽고 딸기 잼, 그리고 계란 프라이를 식판에 받쳐 들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K작가가 물었다.
“예, 그럼 저도 부탁드릴 게요.”
인서는 K작가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작업은 잘 진행 되십니까?”
H시인이 인서에게 물었다.
“저는 여기 오니 새삼 읽을거리가 보이네요. 쉽게 안정이 안 되고 해서 책만 읽었어요.”
안정이 안 되고 있는 주원인은 아무 때나 기습하는 인서의 배앓이었다. 식은땀이 쫙! 나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절절매게 하는 고약한 증상이었다.
“이곳에 올 수 있는 것만 해도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지요. 이 좋은 조건을 잘 활용하셔서 좋은 작품 쓰십시오.”
“네! 선생님도요.”
인서는 그 말을 하자 흡사 하버드대학에 유학 온 학생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전 세계 인재들이 모인다는 하버드대학 캠퍼스, 푸른 잔디에 엎드려 책을 보는 하버드 생들의 자유분방한 그림이 떠오른다. 인서에게는 이곳 토지문화관이 하버드이고 평화와 문학의 전당이었다.
뻐꾸기가 운다. 인서는 자주 뻐꾸기 소리를 들었다. 뻐꾸기가 종일 울어대므로 다른 소리는 일체 안 들렸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시공 속에 저무도록 우는 뻐꾸기와 인생 자체가 소설인 인서가 존재했다.
K작가가 커피를 타 가지고 왔다.
“자아, 차 드시고 산책 가십시다. 저는 오는 날부터 어찌 바쁘게 일했는지 통 바깥 구경을 못했습니다.”
그는 손가락 끝에 바람이 일도록 정신없이 썼다고 한다. 뭐가 될지는 두고 봐야 안다고 했다.
“하하하, 매지사에 모범생이 탄생하셨네요.”
H시인이 커피 잔을 받으며 활짝 웃었다.
인서가 대강 주방을 정리하고 나오자 그들은 벌써 본관 앞 옥수수 밭을 지나 큰 길로 걸어 내려가고 있다. 비는 그쳐 있고, 검은 비구름이 어디론가 성급하게 몰려간다. 고 박경리 선생님이 계시던 서재 울타리에 들장미가 하얗게 피어 그 향기가 바람을 타고 뭉클 날아왔다.옥수수의 큰 이파리들이 바람결에 너훌너훌 춤을 춘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과 접촉을 시도한다.
산책은 글 쓰는 게 본업인 그들에게 필수였다. 방에 들어앉아 글만 쓰다보면 다리가 붓고 몸이 경직되는 것을 누구나 체험한다. 더구나 오늘은 일요일이니 느긋하게 쉬거나 산책 코스가 다소 길어져도 나쁠 것은 없다.
오늘의 인서는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다. 그 생각이 간절하다. 밤새 배가 아파 잠을 설친 때문이다. 책상 앞에 좌정하는 게 길면 길수록 인서는 배가 아프다. 낮에는 계속 더운 물을 마시면서 견디는데 밤은 길고 지루했다. 그녀는 그러나 밤에 잠을 잘 자기 위해서 산보를 선택한다.
몇 년 전 남미에 여행 갔을 때였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타카 공항에 내렸을 때 인서는 아랫배가 사정없이 아팠다. 머리에 열이 펄펄 나고 속도 메스꺼웠다. 진땀이 주체 못하게 뿜어져 나왔다. 긴 여행길에 기내식사가 체질에 맞지 않았거나 멀미 탓이라고 여겼다. 물을 갈아먹으면 발생하는 그런 배앓이로만 알았다.
얼마간 쉰 다음 다시 비행기를 타고 반나절에 걸쳐 띠깔Tikal에 도착했을 때는 거짓말처럼 배 아픔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지역의 울울창창한 원시림에 반해서일까. 청량한 공기 탓일까. 인서는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 속에 섞여 정글 속에 자리한 마야신전Maya神殿의 최정상까지 올라갔다. 생애 최초로 유익한 여행을 경험했다. 피로감을 느끼지 못했다. 식사도 경치도, 함께 한 관광객들도 전혀 불편이 없었기 때문일까. 배가 아프기는커녕 심신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인서는 귀국 행 비행기 안에서 올 때처럼 죽음의 배앓이를 반복했다. 허리도 펴지 못하고 엉기다 시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녀는 늘 가던 병원으로 달려갔다. 몇 가지 검사를 했지만‘이상 없음’이었다.
“선생님! 그럴 리가요. 비행기에서 배가 너무 아파서 저 혼자 내릴 번했다니까요.”
인서가 항의하듯 말했다.
“안인서님 검사 결과는 정상입니다! 일종의 스트레스 같습니다.”
내과 의사는 시험 때, 제사 때, 여행 때, 몸이 쇠약해 질 때, 흔히 나타나는 증상으로 결론지었다. 학생들이 시험 때만 되면 맹장염을 호소한다고 하면서.
“무조건 잘 쉬세요!”
그 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면 남미 여행보다 더 고달픈 어떤 요소가 인서의 정서에 예민하게 작용했다는 것인가. 몸이 배 아픔을 신호로 삼고 인서에게 휴식을 권하고 있는 것인가.
인서는 산책 뿐 아니라 일요일은 원주 시내로 외출하는 즐거움도 누리고 싶었다. 그녀는 이곳 토지문화관에 오기 전부터 원주라는 지방 도시에 남다른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태백, 강릉 방면으로 가는 과정에서 창밖의 시골스러운 풍경에 흠뻑 빠진 적도 있다. 더구나 원주 시내는 가보지 않은 장소이므로 기대가 컸다. 그 기대는 배 아픈 인서에게 사치가 되고 있다.
길가 집, 울타리밖에 분홍색 작약 꽃이 활짝 피었다. 열일곱 어린 여자처럼 탐스럽고 향긋하다. 배가 아픈 인서에게도 예쁜 것은 변함없이 예쁜 것이다.
K작가와 H시인은 큰 길에서 벗어나 회촌교를 건너 오른 쪽으로 꺾어든다. 인서는 걸음의 속도를 빨리 한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새로 지은 집들이 몇 채 보인다. 이곳으로 이주해 오는 도시인들이 늘어가는 추세인가. 유럽풍의 잘 지은 집 주변에는 마늘밭, 옥수수밭, 감자밭이 푸르게 펼쳐 있고, 불두화며 장미넝쿨이 울 밖으로 뻗어 나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길가 뽕나무에 진보라 빛으로 잘 익은 오디가 풍성하게 매달려 있다.
개울물이 차르, 차르, 흘러간다. 흥겨운 가락이다. 비온 뒤라 물 깊이가 더 깊어지고 개울의 면적은 넓었다. 그 물 가운데 우뚝 선 큰 바위들은 하나 같이 미끈하게 잘 다듬은 장년 남자의 면상을 닮아있다.
개울 건너에는 고불고불한 농로, 경운기 하나가 지나가면 족한 정다운 시골 길이 이어지고, 길 옆 논에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벼 포기가 포릇포릇 자라고 있었다.
“여기, 이 올챙이 좀 보세요! 쪼그만 놈들이 바글바글하네요.”
인서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쬐그만 올챙이들이 고무고물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올챙이가 왜 이렇게 작아졌지? 이렇게 작은 올챙이 여기 와서 처음 보네.”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논물에 고물거리는 올챙이를 바라본다.
“걔들도 제초제 먹고 기형이 된 거예요. 저기 좀 보세요! 풀이 시커멓게 타 죽었잖아요.”
K작가와 인서가 H시인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논두렁의 예쁜 천사들, 엉겅퀴, 하얀 민들레, 애기 똥풀, 클로버 종류가 제초제에 까무라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H시인의 제초제란 말에 인서는 소름이 돋는다. 이따금 제초제가 사람을 죽게 하는 독약으로 둔갑한 기사가 뜬 일이 있었다. 실제로 그건 식물한테나 사람에게나 해로운 화학물질이다. 일손이 달리고 농비도 절약할 겸 농촌에서는 손쉬운 방법으로 제초제를 사용한다고 했다. 쌀도 대부분 그렇게 재배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고흥에서 온 시나리오 작가에게 들은 것 같다. 운 좋게 살아남은 올챙이 가족들이 논물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저녁 새로 입실한 분들을 위해 입실 환영 파티 연다는 이야기 들으셨나요?”
올챙이를 보느라 넋이 팔린 인서에게 H시인이 물었다.
“네? 입실 환영 파티요? 그게 무슨 파티 거리가 되나요?”
인서는 올챙이에서 고개를 들며 반문한다.
“어제는 퇴실하는 분들 파티도 했다는데요.”
"입실, 퇴실, 파티 하다가 그럼 글은 언제 쓰나요?”
“그래도 쓰는 사람은 잘들 쓰나 봅니다.”
K작가는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음성에 자신감이 실려 있다.
“저는 요, 사람 만나는 거 피할 겸, 위암 수술하고 제대로 쉬지도 않고 큰 맘 먹고 여기로 왔어요. 연초에 입실 희망서를 내고 날자를 받았으니 당연히 와야죠. 엉덩이에 못이 박이도록 한 장소에 죽치고 있어야 해요. 자꾸 들썩거리면 아무 것도 안 써져요. 우리가 여기 까지 온 게 다 그런 이치 아닙니까.”
인서보다 하루 앞서 입실한 H시인은 인서와 K작가에게 동의를 구하듯 분연히 말했다. 그래서 시내로 출타하여 외식을 하지 않고 이른 아침 빵과 계란 후라이를 드셨던가. 시간도 절약할 겸.
“마, 일단 여기 왔으니까 우리는 여기 식대로 따라야죠.”
사람 좋아 보이는 K작가가 입실 환영 파티를 긍정적으로 시인하는 눈치다.
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토지문화관 문객들이 수시로 와서 물수제비를 뜬다는 방죽에 이르렀다. 방죽으로 내려가는 길은 간밤에 비가 와서인지 꽤나 미끄러웠다.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운동화 바닥에 벌건 황토 흙이 찐득하게 달라붙는다.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먼저 내려간 H시인이 말했다.
방죽에는 며칠 내린 비로 물이 거의 산기슭까지 차 올라있었다. 산 그림자를 품고 있는 거무스름한 수면 위로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왔다.
그들은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 우주를 들여 마신다. 강원도의 청량한 바람을, 푸른 오월을, 검푸른 방죽을, 가슴에 품어본다. 마음이 붕! 공중으로 뜨는 것 같다.
방죽 근처에는 널린 게 돌이었다. 넙적하고 얄팍한 돌을 주어와 각자 물수제비를 시연한다. 시용! 돌 한 개가 물위를 미끄러지다가 얼마 못 가 물속으로 퐁당! 갈앉는다. 방죽 물이 둥글게 넓게 파문을 그린다.
시용! 시용!
연거푸 물수제비를 시행한다. 어른 세 사람은 애들처럼 신이 나있다. 어쩌다 수석처럼 보이는 돌을 발견하면 환성을 지르기도 한다.
“어, 시원하다! 여름에는 물이 최고야!”
물수제비 뜨기에서 실패를 거듭하던 H시인이 방죽에 엎드려 손을 물에 담근다. 그의 얼굴은 시낭송 할 때처럼 상기한 모습이다.
“어찌 여름뿐이겠어요?”
인서도 방죽 물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곧 등허리가 서늘해진다.
오전의 산보는 적지 않은 효과가 있었다. 숙소에 돌아온 인서는 배 아픔이 슬그머니 소멸한 것을 기적으로 여기며 읽던 책을 펼친다. 물수제비가 물속으로 퐁! 빠져 사라지지 않고 방죽 끝까지 도달하듯, 현재 상태라면 날이 어둡기 전에 빌려온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는 말의 예술, 시어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 시인은 침묵의 사원에서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집전하는 말의 사제다. 그러므로 쓴다는 것은 언어의 생생한 출현이며 아울러 사라짐이다’
인서는 문장 갈피마다, 단어 마다 그 어휘의 다양성, 절묘한 표현감각, 정교한 분석과 평설에 놀란다. 흠뻑 취한다. 감히 외람되게도 유협劉勰의『문심조룡文心雕龍』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문심조룡』의 저자 유협은 강소성 진강에서 빈한하게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한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약 5,6년에 걸쳐서 저작한 문심조룡은 도합 50장으로 이루어졌다. 중국문학비평사의 첫 번째 장편거작, 청나라 이래 문학비평의 경전으로 평가받아온 책이다. 인서가 중국의 산수자연시를 공부할 때 거의 몰아의 경지에서 읽은 책이었다.
유학자이면서 불교에 정통한 유협의 문학관은 道 聖 文의 핵심적 개념위에서 건립, '문학이 인생의 근본이고, 인생은 또 도의 근본으로서 도는 우주법칙을 대표한다고 한다.’
인생의 근본인 문학! 인서는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매우 행복하다. 『문심조룡』을 읽던 그 시절이 생각날 정도로 《풍경의 탄생》에서도 거의 완전 심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주의적 현실과 제도는 여성의 자아와 본능을 말살하고, 여성을 학살하는 일방적인 희생과 강요를 정당화하고 고착시켜 왔다. 그러나 그녀들은 죽지 않는다. 그녀들의 가슴 속에는 부글부글 끓으며 흘러가는 용암이 있다. 그녀들은 신생을 꿈꾼다. 그녀들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생산력이 고갈된 땅을 새롭게 갈아엎는다. 너무나 오랫동안 소진되어 이제는 메마르고 바스러지는 여성, 대지를 갈아엎는 행위는 여성적 정체성에의 회복에 대한 열망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받으며 시를 쓰는 여자 이야기인가. 시론에서 여성론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이제는 메마르고 바스러지는, 다 맞는 말이다. 인서 그녀 역시 몸과 마음 추스르고 땅을 새롭게 갈아엎기 위한 행보가 아니겠는가. 수년을 벼르고 별러서 토지문화관에 온 인서의 예가 스스로 그렇다고 시인한다.
‘우리가 1년에 500 파운드를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면’하고 소망하던 버지니아 울프!‘나의 불빛이, 자기만의 방이, 한 사람의 인간이 그리워진다’ 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가 이 책에서도 공공연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인서도 자기만의 방이 절실해서 토지문화관으로 달려온 것. 단지 그 기간이 한 달에서 많게는 석 달에 한정된 자유라 할지라도 인서는 무한 감사했다. 그 고마움이 인서는 눈물겹다. 이곳에 머물며 새벽에 잠 깨어 글 쓰고 책 읽으면서 인서는 자주 하버드대학 유학생이 되곤 하였다. 신천지의 황홀경에 빠진 듯 뿌듯한 자긍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심조룡』과 버지니아 울프를 기억해낸 인서는 점점 책속으로 몰입 되어가는 자신을 인식한다. 저자가 예리하고 정확하게 여성 문제를 잘 꼬집고 있다고 수긍한다. 몰입의 시간은 장장 5시간이었다. 자칫하면 자기 몸의 학대 홀대로 이어지는 과실을 저지르는 행위라고 할 만하다. 인서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된 것을 알지 못했다. 배 아픈 증상은 저절로 희석되었다. 그녀는 승리감, 성취감에 취하여 천천히 본관으로 이동한다.
이 책의 저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구절구절이 신랄해! 이게 바로 비평가 정신이 아니겠는가!
인서에게 저자의 이름자는 익숙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일이 없어 그 형상은 감이 안 잡힌다. 지구의 멀고 먼 외딴 섬에서 하버드대학에 유학 온 촌뜨기처럼 인서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기뻤다. 독서의 위력이었다.
식당 안은 썰렁하다. 아무도 없다.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인가. 전원 금식하기로 결심했나. 인서는 광물질 같은 햇반보다 차라리 빵을 먹기로 한다. 아침처럼 빵을 구워 먹고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읽은 책을 반품하고 인서는 다른 책을 고르지 않은 채 그대로 도서관을 나온다. 《풍경의 탄생》에서 맛본 신천지의 황홀경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인서의 방 앞에 누군가가 와서 문을 노크하고 있다.
"아, 이제 들어오시네요. 선생님! 오늘 저녁에 입실 환영 파티 있는 거 아시죠?”
귀래관 맨 끝 방의 동화작가였다.
“아이고! 나 그런 거 생소해요. 무슨 파티를 다?”
“파티, 멋있잖아요? 동업자끼리 한 자리에 모여서 얼굴 한 번 보는 거죠. 준비하고 오세요! 장소는 귀래관 휴게실이에요.”
인서는 난감했다. 내일 아침 첫차를 타고 나가 서울 병원에 갈 계획이면 하루 일과를 일찍 마감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배 아픈 증세가 도깨비 출몰하듯이 오락가락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안심은 금물이다. 토지문화관에 온 이상 배 아픔으로 해서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원인을 알고 대처를 해야 할 것이었다.
인서가 어둑한 시간, 입실 파티 장소인 휴게실로 간 건 예외적인 일에 속한다. 꼼짝 않고 긴 시간을 책읽기에 사용했으니 쉰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서니 토지문화관의 하숙생, 문객들이 방을 꽉 메우고 있었다. 식탁에는 각종 과일이 빨간색 노란색 화려한 색감으로 식욕을 돋운다. 휴일 식사가 부실한 편이더니 양념치킨도 눈에 들어오고, 생선회와 소주병도 몇 병 놓여 있다. 초고추장이 풍기는 새콤한 내음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번져왔다.
“자아 이제 입실 환영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이 자리를 빌어 귀한 자리를 준비해주신 토지문화관 선생님들과, 입실 선배님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 분 반갑습니다. 각자 앞에 있는 잔을 높이 들어주세요! 건배하겠습니다. 제가‘문학을!’하면 여러분은‘위하여!’하시는 겁니다!”
“문학을!”
“위하여!”
일순 쨍! 하고 유리컵 부딪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우와하하, 하고 호쾌한 웃음을 합창으로 날렸다.
“그럼 먼저 안인서 선생님께서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다.
인서는 늦게 온 벌인가 싶어 그 억양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중앙에 앉아 있는, 얼핏 보아도 키며 몸집이 그다지 우람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왜소는 아니었다. 인서의 눈에 비친 그는, 체격이며 이목구비가 잘 짜 맞추어진 아담한 남자였다.
인서가 머뭇거리자 인서 방을 두들기던 동화작가가 친절하게 속삭여준다.
“선생님! 본인 이름, 그리고 사는 곳과 등단연도, 저서, 그리고 소설을 쓰시게 된 동기나 그 외 재미있는 이야기도 좋습니다.”
통과의례? 입실 신고? 인서는 황망 중에 잠시 생각을 정리한다. 이를테면 문학정보를 발설해야 하는 순서였다. 인서는 피해 갈 수 없는 사정임을 알아차린다.
인서는 당황스럽다. 방송국에 가서 인터뷰 할 때도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인서가 말하지 않을 구실 또한 당장은 찾아지지 않았다. 인서가 어렵게 입을 열어 자신의 문학과 인생에 관해 비교적 소상하게 말을 마쳤다. 일시에 장내분위기는 침묵과 엄숙함으로 일변했다.
“그러시구나. 참, 대단하십니다. 한 가지도 힘든데 학문과 문학, 두 가지를 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회자의 말에 “어머!”하고 주변에서 탄성이 터진다.
“기왕 오셨으니까 좋은 작품 쓰십시오. 다 함께 박수로 안인서 선생님을 칭찬 하십시다”
박수소리가 일순 방안의 공기를 새롭게 채웠다. 사회자는 그 다음 순서로 H시인을 호명했다. 일곱 번째 시집을 준비하기 위해 위암 수술하고 퇴원 후 곧 입실했다는 H시인이었다.
"훌륭하십니다. 이 자리에서 선생님의 자작 시 한편 낭송해 주십사 청하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사회자는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시 낭송을 제의했다.
H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하자 장내는 침묵과 긴장에서 안온함으로 갈앉는다. 부드럽고 따뜻한 정감이 묻어나는 시였다. 맑고 편안한 음성 또한 사람들의 가슴에 젖어들었다.
식탁에 놓여 있는 음식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방울토마토나 참외 보다는 치킨과 생선회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돌연 인서의 배가 사르르 아파지기 시작했다.
“지금 좌장을 맡고 계시는 분 성함은?”
인서는 자신의 곤란한 경계를 넘어보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알고 싶었다. 방으로 들어설 때 인서는 직사각형 탁자의 중앙에 자리 잡은 가무잡잡한 피부의, 다른 이들에 비해 너무나 당당해서 도도해 보이는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혹 시인? 혹 평론가? 혹 내가 모르는 유명소설가? 인서는 혼자 추리하고 판단을 내렸다. 왜냐하면 그의 자리가 중앙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모임이나 각기 자리에는 그만한 타당성이 있다.
“선생님 모르셨어요? J시인, 평론도 하시고, 『풍경의 탄생』을 쓰신 분이세요”
좀 전에 인서 방을 두들기던 그녀였다.
‘앗!’
인서는 반 강제로 손에 들게 된 소주잔을 바닥에 떨어트릴 번했다. 떨어트리는 실수는 면했지만 소주가 흘러 인서의 손을 적시고, 예의 하얀 손수건이 신속하게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인서가 버지니아 울프와 『문심조룡』을 떠올리며 황홀경에 빠져 읽은 바로 그 책의 저자였기 때문이다.
인서는 너무나 놀라서 그 다음 순서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자세히 헤아릴 수가 없다. 각자 자기정보와 문단 이력을 진솔하게 신고했을 거라는 것, 분주히 소주잔이 오간 것, 그리고 누군가가 술을 계속 들이켜고 나서 발악하듯 흘러간 옛 노래를 밤이 늦도록 뽑았다는 것, 결국 문학을 위하여 개최된 입실 환영 파티는 문화 예술적으로 종료되었을 거라는 것이 인서가 유추할 수 있는 파티의 전말에 해당한다.
그 밤 숙소에 돌아온 인서는 우수한 예술가 집단의 일원으로 편입한 듯 흥분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입실파티에 모인 이들의 들꽃처럼 순정한 문심文心과 소박한 포부에 목이 메었다.
입실 환영 파티 이후 배 아픔이 다시 그녀를 공격했다. 아마도 신체적 감정적 과부하 현상일 것이다. 배 아픔을 도깨비라고 지칭한다 해도 이건 몹시 성가시고 얄미운 도깨비에 속한다. 병원 가는 일을 연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다음 날, 인서는 몸이 아파 병원에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접수했다. 사무실 직원은 인서에게 시외버스 시간표를 주었다. 첫차를 타기에는 두 시간여나 기다려야 했다. 인서는 인사 겸 매지사의 H시인의 방으로 갔다.
진즉에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었으니 인서는 잠시 사용하자고 꽁꽁 싼 가방을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부득이… 선생님 컴튜터를, 제가 지금 좀 사용할 수 없을까요?”
인서가 변명처럼 늘어놓으며 H시인의 컴 앞에 좌정했다.
그녀는 컴을 열고 <내일은 맑음> 하고 제목을 입력한다.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듯 문장이 폭죽처럼 폭! 폭! 터져 나왔다. 금세 한 작품이 탄생하고 있었다. 장차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인서는 내일은 맑음이라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녀의 글에서 내일은 맑아야 한다는 굳센 소원이 소용돌이쳤다. 그녀의 내일은 단순히 시차적인 내일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었다.‘진실로 원하는 곳에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격발되는 그 마음이 다다르는 곳’ 인서에게 맑은 내일, 그것은 그녀의 총체적 삶의 결실을 가름하는 빛나는 미래였다.
단숨에 초고를 쓴 인서는 그것을 읽고 수정할 사이도 없이 일단 자신의 메일로 발송하는데 성공했다.
“H선생님 감사합니다. 멀쩡하게 있다가 갑작스럽게 (문장이) 쏟아져 나와서요.”
“그게 바로 프로정신이라는 거 아닙니까? 보아하니 글 솜씨가 탄탄, 오래 연마하신 실력이신데요.”
“선생님. 별 말씀을. 이상한 것은 저는 여기 와서 어떤 힘을 느껴요.”
“하긴 저도 좀 그랬습니다. 입실 파티까지 하고 나니 나름대로 고무되고 분발심도 생기네요. 우리 함께 문학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십시다.”
“H선생님도 보통 분이 아니세요. 암 수술하고 쉬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오시다니. 입실 파티에서 자작시도 낭송하시고요.”
“지금 이 시간이 저는 가장 행복합니다.”
인서가 컴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 밤 입실 환영파티에서 좌장을 맡은 그분 책, 방금 도서관에 가서 빌려 왔어요.”
K작가가 H시인 방으로 다가오며 소년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손에 인서가 삼매지경으로 읽은 J시인의 [풍경의 탄생]이 들려 있었다.
“저는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H시인과 K작가가 손을 흔들었다. 오월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멀리서 시외버스가 금계국 꽃이 파도치는 회촌 마을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서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출처 : 변영희 소설집[입실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