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9단지에 갔다. 겨울 날씨치고는 푸근하면서 쾌청이었다.
나는 어제 오후 식재료를 사다가 끓이기에는 재료비며 시간, 노고가 더 클듯해서 아예 인사동 골목의 갈비탕 잘 하는 집에 가서 몇 그릇 사왔다. 교통사고로 8주 이상 생병을 앓는 아들이 안타까워서였다. 갈비팅먹고 어서 회복하기를 비는 마음이었다.
아들집에 전해주고 돌아오는 길은 평화로웠다. 밤새 내린 서리가 녹아 근근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산수유열매가 눈부셨다.
햇살 잘 드는 근린공원 들마루에 잠시 앉아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겨울여행에 제격인 날씨가 못내 아쉬웠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웠다.
"친구야 뭐 하니?'
2017년 4월 S호텔에서의 동창회 때 보고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날그날 자주 만나는 이웃 친구가 더 살가울 때도 있지만 코흘리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동창 친구에 비할 수는 없다.
"은수구나! 그래 반갑다. 너도 잘 지냈니?" 그렇게 운을 뗀 수다가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다.
무심천 둑길과 남다리가 등장하고, 석교동 은수네 집에서 먹던 들기름에 구운 감자 이야기며, 최근의 허리 수술까지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듣는 입장이었고, 은수는 긴 이야기 끝에 얼마 전 세상을 뜬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보면 우리 곁에서 떠난 이들이 어찌 한 둘이랴. 올해 내 막내 여동생을 비롯, 가장 가까웠든 초등친구와 지인들이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낙엽처럼 이승을 하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로병사가 끊임없이 우리 곁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친구는 골프로 다년간 건강을 다져온 줄 알았는데 뒤늦게 수술이라니 놀라웠다.
"수술해도 아프단다."
나는 이미 20여년 전에 대수술 경헙자였다. 수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수술 후에 달라진 것은 인정이고 환경이었다. 정형외과는 세월 지나면 낫는다고 말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나는 친구를 어떻게 위로해 줄지 몰라 허둥거렸다.
일하는 아줌마를 불러 모처럼 꼬리곰탕을 끓여놓고 아들 며느리 내방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먹고 싶으면 한 그릇 사다가 너 혼자 먹고 말지, 젊은 애들이야 저들이 알아서 먹을 텐데 나는 친구가 안쓰러웠다. 겨울 해가 짧은데 오후 3시가 넘을 때까지 아무런 기별이 없다며 친구는 '다 그런 거지 뭐' 하며 마음을 토로했다.
'다 그렇기는, 더 기다려봐. 저녁에 올지도 모르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효도라는 말이 희귀 단어가 된지 오래 아닌가..
나는 함께 곰국을 먹어줄 아들 가족을 기다리는 친구의 심정이 십이분 이해되었다.
"너랑 가까운데 살면 함께 산책도 하고 차도 마실텐네"
친구가 여운을 남기며 전화를 끊었다. 수술 후에 마음이 허전한 친구를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우리의 우정을 돌이켜 본다. 어둠이 다가오는데도 오지 않는 은수의 아들처럼 우리의 우정도 속절없이 저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부모자식간의 온정, 친구간의 우정도 점점 메말라가는 세태가 두려워진다.
늦게라도 은수의 아들이 빵! 빵! 크랙숀을 울리며 은수의 아파트에 당도하기를 기원한다. 더 어둡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