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첫날 비가 내린다/변 영 희
지난 밤 여자는 저승사자의 내방을 목도한 것 같았다.
너, 갈래? 안 갈래?
저승사자 일행이 여자 앞에 일렬로 줄 지어 서서 왼팔을 잡아끌었다.
하필 왼팔이냐?
태백산 오지에 위치한 큰 절. 무슨 행사 때 가게 되면 정성스럽게 챙겨주던 비구니 스님. S대 재학시절 가정교사를 하던 집에서 불교를 처음 접하고 졸업과 동시에 스님의 길로 갔다는 M스님. 곱상한 용모에 마음씨마저 비단결이었던가.
한 여름에도 철야기도하려면 임시로 가설한 천막은 사람들의 입김과 숨결이 급냉急冷으로 둔갑하는 냉기 충만한 장소였다. 저 아래 공양간에서 트럭에 실어와 나누어 주는 대추차와 비빔밥 대접이 일시에 식어버리는 한빙寒氷 나라에서 여자는 그 해 초 봄, 스무하루를 도반들과 함께 지냈다.
대수술 후에 무슨 오기처럼, 아니 인생 터닝포인트를 염두에 두었던가. 여자는 용감하게가 아닌,무식하게, 스무하루 동안의 음력 삼월삼진 기도 행사에 동참했다. 계절은 봄이지만 첩첩산중 그곳은 한 겨울이었다. 절에서 지급해주는 담요로 수술부위를 감쌌다고는 하지만 등이며 얼굴보다 허리와 두 다리가 동상이 걸릴 정도로 시린 것은 참기 어려웠다.
‘너무 힘들면 요사채는 이미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기도꾼들로 만원이니 내 방으로 와서 몸을 녹여라‘
M스님의 권유가 생각났지만 스님이 주신 핫팩을 배와 허리 참에 붙이고 이 기도가 힘들다고 중지하면 다른 일은 더 엄두도 못 낼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잘 참아내려고 노력했다.
[묘법연화경] 기도가 거의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중반을 지나 회향 일자가 다가올 무렵 태백산 일대에 큰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낮이고 밤이고 분간 없이 눈은 내렸지만 그날의 함박눈은 온 산과 들, 사찰 건물을 삽시간에 눈 속에 파묻었다. 그 밤 기도를 마치고 천막을 나와 천천히 산을 내려가던 일행들이 “아이쿠!” 비명을 지르고 하나 둘 빙판에 미끄러졌다.
어떤 이는 바로 일어서서 눈을 툭툭 털고 훠이훠이 걸어갔지만 나이 든 보살들은 다리와 팔에 골절상을 입고 청년들 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졸지에 여자의 왼 팔이 두툼하게 껴입은 오버코트 소매자락에서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기다시피 요사채로 내려왔으나 폭설에다 여명도 채 안된 시각이라 병원으로 나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요사채 기둥에 기대앉아 날 새기를 기다리며 으으~ 으으~ 비명을 흘리고 있었다. 전쟁터의 장병이 떠올랐다. 그들의 부상에 어찌 비교할까마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야 사찰 소속의 차를 타고 장성병원으로 갔지만 의사 부재로 다시 대기. 근근이 호출을 받고 늦게 출현한 의사가 팔을 잘못 끼워 맞추는 바람에 오히려 뼈가 으스러져 아!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아팠다. 아침햇살이 번지자 붕대로 칭칭 감은 팔을 끌어안고 안동병원으로 이동했다. 산길 들길을 달려가면서 여자는 수시로 변화하는 산 기운을 살피지 못한 어리석음을 자탄했다.
안동병원에 도착해서 부러진 팔에다 쇠꼬챙이를 박는 처참한 수술을 받았다. 잠은커녕 쇠꼬챙이가 박힌 팔을 받쳐들고 미친 듯이 병실 복도를 배회했다. 통증이 얼마나 지독한지 밤새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생뼈에 쇠꼬챙이를 박은 것. 그 무서운 일을 겪어낸 왼 팔이 저승사자를 불러온 것일까. 태백산의 한기를 품은 듯, 그게 오래 전 일인데도 떨어져 나갈 듯이 애리고 쑤시고 저렸다. 비가 오려나. 눈이 오려나. 여자의 팔은 일기예보를 한 셈이었다. 창밖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어제까지 맑고 푸근했는데 구름이 몰려올 때부터 아프기 시작한 옛상처가 비 내리면 차라리 그 아픔이 희석된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정을 안다, 여자는 아들이 걱정이었다. 아들이 음주 뺑소니차에 치인지 두 달 여 만에. 첫 출근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두개골이 덜 아물어 어지럽고 두통이 난다고 했다. 아들은 아직도 환자였다.
사람은 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못하는가. 좋아하는 일이 생업이 된다면 더욱 능률이 오를 것이고, 성과도 좋을 것이 아니겠는가.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노래였다. 성악과가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첫돌도 채 되지 못했을 때부터 래디오에서, TV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가사는 몰라도 도레미파솔라시도 음정은 정확하게 흉내낼 줄 알았다.
예능 계통 진학은 금수저 출신에게나 가능한가. 아버지와 쌈쌈을 한 끝에 미술대학에 진학한 큰 아들은 과 30명중에서 반 이상이 보결생이라고 했다. 학과 임원으로서 댓생 하나 할 줄 모르는 색맹들하고 함께 공부할 수 없다며 부정입학에 관여한 교수와 학생을 추방하는 시위대열에 참가하기도 했다, 결국은 타 학교로 전학하는 사태를 빚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당시의 의협심이랄까 치기 어린 저항주의는 사그러들었다. 선천적인 소질과 재능이 없어도 예체능은 금수저 출신 부모의 성분에 좌우되는 코스라는 걸 확인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첫째의 미술대학에 이은 둘째의 성악과는 그들의 보호자에게 엄청난 사건이고 도전에 버금갔다.
‘사내자식이 뭐 할 게 없어서’ 뭐 할 게 없어서가 아니었다. 천성이고 소명일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거나 헤아리지 못했다. 숫제 거부였고 강력한 반대입장이었다. 집안은 갈등과 불화의 연속이었다. 여자는 아들 교육을 잘 못 시킨 주범으로 닦달을 당했다. 아들교육 하나 제대로 못 시키는 무능력자로 전락했다. 아들과의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장은 수시로 독화살을 쏘아댔다. 아들이 키타를 부수고 하루아침에 행방을 감추는 사태로 돌입한 것이다.
절이었다. 아들이 간 곳은 경상도 깊은 산중의 아담한 절이었고. 그 절에는 비구니스님들만 상주했다. 요양차 머무는 환자들과 고시공부, 대입 준비하는 청년들이 여럿, 요사채에 기숙하고 있었다. 둘째를 만나러 간 여자는 그곳에 눌러앉고 싶었다. 고요와 안정이 운달산 雲達山자락에 노다지로 펼쳐져있었다.
초파일 연등을 달기위해 사찰에 머물고 있는 청년들이 절 마당에 모였다. 그들의 모습은 완전 평화였다. 아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왔다. 집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는 밝은 얼굴이었다.
“이 학생이 젤이라요. 어찌나 염불을 잘하고, 키타도 잘 치고 절에 일도 잘 도와주고 신통해요.”
큰스님이 아들을 칭찬했다.
큰스님 상좌로 몇 달을 사찰에서 지내고 집에 돌아온 아들이 다시 키타를 손에 들었다. 오선지를 늘어놓고 앉아 작곡, 작사도 직접했다. 일상의 질서가 회복된 줄 알았다. 그대로 두었더라면, 공기좋고 물 좋은 산천에 아들을 맡겨두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참사는 면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범패와 바라춤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머를 제법 구사할 줄 아는 산사음악회의 진행자? 불자 가수? 상상이 분분하다. 억지로 사바세계로 끌어다 놓고 무슨 영화를 보겠다는 것인가. 이 절망, 이 후회를 어찌 할 것인가. 가장의 질타에 맹종한것도 후회의 일면이었다. 경제독립이 불가능한 여자는 오판, 실패를 거듭했다.
누구나 자신의 길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낳은 부모라고 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학과와 직업전선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부모의 억측이고 강요이며 가부장적 전권행사가 아니겠는가.
감옥에 간 나어린 음주뺑소니에게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하고 거액에 상당하는 치료비를 홀로 감당하고서 엄마없는 두 명 손자의 학원비가 걱정이라는 아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로 겨울 비 내리는 날 출근을 단행한 아들이 안쓰럽다. 여자의 마음을 위로하듯 겨울 비는 밤이 이슥토록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