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에 가다
-맑은꿈을꾸다가한조각구름처럼가신조병화시인을기리며
2019년 6월의 국제 펜 한국본부 세계한글작가대회 기념 제4회 문학기행은 안성 지역이었다. 고 편운 조병화 선생님의 난실리 문학마을을 비롯하여, 우리가 첫 번째 방문객이 될 거라는 박두진 문학관 탐방, 그리고 1801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화전을 일구면서 숨어 살던,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성자의 묘소와 그를 기념하는 경당이 있는, 순 우리말 은하수 - 미리내 성지 답사였다.
언제나 그랬듯 K사무총장의 역사와 문학을 아우른, 유려하고 박식한 현장 설명이 곁들여져 한결 신명나는 나들이가 되었다. 안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 편운 조병화 선생님이었다. 20대 시절 조병화 선생님의 시집을 바바리코트에 넣고 다니며 여행할 때, 혹은 까닭 없이 지극한 외로움을 탈 때, 독백하듯 줄줄 외웠기 때문일까.
가끔 찾아가던 선생님의 혜화동 서재에는 시와 그림과 함께 꿈길처럼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다.
난로 위에 주전자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옆에서 시를 쓰시던, 선생님의 베레(Bere)모와 파이프는 인상적이었다. 은행나무 잎이 펄 펄 날리는 늦가을, 그 잎들이 시청으로 가는 골목을 노랗게 물들일 즈음, 선생님의 시는 내 지병인 외로움을 희석시키는 청량제였다.
이렇게 될 줄은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쳐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마치 7언 고시(古詩)처럼 일정한 음률이 있어 외우는데 박자가 잘 맞았으며, 청주에서 올라와 서울 생활을 처음 시작한 당시의 내 정서와도 제법 잘 어우러졌다. 나는 고요한 마음으로 편운재, 문학관, 묘소, 서재를 돌아보며 내가 아는 조병화 선생님의 면면을 추억했다. 무엇보다도 나의 역사적인 장편소설 《마흔넷의 반란》출판기념회를, 그날 그 시각 선생님의 주옥같은 말씀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변영희는 무서운 여자다. 문단에 좋은 업적을 남길 역량 있는 소설가다. 문장의 매력, 속도감, 표현기술, 소설적 필연성, 아름다운 정경, 눈을 아끼느라고 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헤르만 헷세 문장에 말려들듯이 읽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쓰라.’
‘대성할 것’ 이라며 덕담으로 더 향기로운 말씀을 하신 것이라 해도 첫눈 내리던 그 밤의 출판기념회는 벅찬 감동이었다. 문학 동인들과 지인들, 더구나 눈이 내린다는 예보에도 굴하지 않고 그 밤 버스를 대절하여 올라온 청주의 내 친구들도 조병화 선생님의 휘황한 찬사에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원고지 4,500매에 이르는, 소설 3권을 신들린 듯 한달음에 쓰느라 기력을 몽땅 탕진한 상태에서 선생님의 말씀만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입력되어 여태도 가슴을 적신다. 맑고 푸른 날 조병화 문학마을, 편운재 뜰에 서고 보니 십 수년 전 이른 새벽 경희의료원 장례식장을 출발, 이곳 안성에 도착하여 문우들과 선생님 무덤에 꽃을 뿌리던 기억도 새롭다.
진솔하고 편안한 시, 읽을수록 영혼이 투명해 지는 선생님의 시,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한, 한 점 구름이 되는 그날까지 나는 쓰고 또 쓸 것이라고 본다. (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