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의 수렁에서
독감의 수렁이라고 해야 할까. 늪이나 뻘밭이라고 해야할까.
그게 생소한 이름도 아니고 살아오면서 수 차례 감기 또는 독감을 앓은 적이 왜 없을까.
그러나 이번에 내가 겪은 독감은 아직까지 앓아본 경험이 없는 악성, 독성이 가미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걸렸다면 분명 구급차를 불러 타고 응급실로 대여섯번 달려 가고도 남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진수렁 ,늪, 뻘밭이 등장할까.
땀으로 범벅된 온몸에 한기가 쭉쭉 돋으면서 폭발하는 기침!
한 번 시작하면 오장육부가 끌어올려지듯 격렬하고 험악하다.가슴이 막 부서진다.
입천장에 달라붙는 가래와 주르르 흘러내리는 콧물, 어떤 때는 숨도 쉬지 못하게 콱 막히다가, 또 아니면 갑자기 코피가 팡! 터져서 잠시 그 험한 기침의 와중에도 와락! 겁을 먹게 하기도 했다. 혹 이상한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쓰던 소설 완성도 못 하고 죽는 건 아닐까. 죽는건 상관없는데 요는 죽기까지 당해야 할 고통이 문제였다.
이번 기침은 그 악랄함과 고약하기가 비교할 대상이 없고, 낮도 밤도, 끝도 시작도 없는 점에서는 어떤 설명도 부족하다. 특별히 다른 데 아픈 곳보다 기침이 성가셨다. 성가신 게 아니라 아예 지옥터널이었다. 한 여름에 왜 이런 악마가 나에게 온 것일까? [입실파티] 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끼니를 소홀히 한 까닭인가?
한 번 시작하면 3분 내지는 5분가량 계속되고,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현상이 저무도록, 한 밤중에도 반복된다. 옆집에서 층간소음으로 벨이 울릴 정도로 그 소리가 엄청 크다. 울컥! 울컥 넘어오는 가래를 처치할 겨를도 없이 절절맨다., 그때마다 사람꼴이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되곤 한다.
감기 증상이 느껴졌을 때 무슨 병이든 초기에 잡는다며 병원을 갔다.
"별로 심하지 않다" 는 진단과 함께 3일분 약을 처방받았다. 만약에 3일 분 약으로 치료가 안되면 다른 병원으로 가보라며 그 병원은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했다. 별 게 아니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뜻으로 알았다. 그러면 이 약만 잘 복용하면 나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아니었다. 약을 복용하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점점 기침이 심해졌다.
전에 살던 동네 병원이 익숙해서 이틀 간격으로 몇 번 갔다. 코와 목을 뜸질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약값이 먼저 갔던 병원의 6배로 제법 비쌌다. 억지로라도 밥을 한 술 뜨고 열심히 먹었다. 허사였다.
다시 다른 병원을 찾아갔다. 주사맞고 매번 비슷한 치료와 처방. 약 가지수가 6개 7개로 늘어났다.
거부반응이 왔지만 기침을 나을 욕심으로 묵묵히 복용했다. 먹어봤자였다.
주사는 어떤 손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디에 찔렀는지, 한 주일이 지났는데도 타박상을 입은 듯 많이 아프다.
주사를 한두 번 맞아보나? 통증을 느낄 때마다 불쾌감이 따라온다.
독감의 수렁에 푹 빠져 허브적거리기 2주가 경과하자, 낫지 않아! 나을 것 같지가 않아! 절망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병원 처방 외에 백도라지청을 따순물에 꿀을 타서 마시는 일. 무를 갈아 꿀넣고 중탕, 따순 차 수시로 마시기. 찬 과일과 음식 입에 안 대기, 나름 노력했으나 백약이 무효했다. 독감은 그 기세가 날로 드세지기만 했다. 약을 먹다가 두다리를 뻗치고 앉아 엉엉 울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게 더 못 견딜 노릇이었다. 막막했다. 병원에 입원?
아니다! 절대 입원은 안 한다! 그 좋은 의료시설, 의료진, 갖은 의술과 처방으로도 며늘아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부터 입원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그것은 돈 쓰고 생명 연한을 삭감시키는 일이었다. 득이 없다.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이 실험 저 실험 다 당하고 나서 마침내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뻔한 결과가 보이지 않는가.
죽지 않으면 살기다. 인명은 재천이라는데 하늘이 나를 죽이고자 하면 죽어줘야지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설마 독감으로 죽지는 않겠지? 이때까지 온갖 병명으로 병원에 퍼다준 돈이 얼마인데 또 그 짓을 되풀이할 이유가 무엇인가.
친구가 특급택배로 약을 보내왔다. 전화할 때 내 음성을 듣고 그냥 두었다간 큰일나겠다 싶었단다.
그동안 눈물 콧물 흘리면서 앓을 만큼 앓은 셈인가. 친구의 약 덕분일까? 독감이란 불한당이 내 신체에서 노략질을 이쯤에서 종료하려는 것인가? 친구가 보내 준 약을 하루 이틀 복용하면서 나는 비로소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치료되지 않는 병이 그게 무슨 병이란 말인가. 못 고치는 의사와 병원이 있을뿐 나는 지금 낫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어떤 약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앓은 만큼 영리해지는 아기들처럼 내 영혼의 세계도 혹독한 독감을 견디면서 긍정적인 반전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며칠 있으면 상을 타러 가야 한다. 오랜 만에 어렵게 타는 상이다.
예쁜 옷을 입고 오라는 당부이지만 옷은 고사하고 콜록콜록이나 멎어주면 천만다행일 듯 싶다.
독감! 흉악한 놈! 썩 물렀거라! 네 이놈! 다시는 내 몸에 침범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