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9.06.01. 오전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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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일 년 동안 방황하며 시간을 흘려보낸 청년이 진료실을 찾아왔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아픔에 휩싸여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고 한다. 슬픔에 잠겨 한 달 두 달을 흘려보냈는데,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어느새 일 년이 지나버렸다. 그때를 돌아보면 자신은 인생 레이스의 낙오자처럼 느껴진다고 청년은 말했다. 지금은 의욕을 되찾고 취업을 준비 중인데, 만약 면접관이 그 일 년에 대해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했다. 자기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오점을 남겼고, 그것 때문에 직장을 얻는데도 실패하고 말 것이라며 불안해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시간을 되돌려 자신의 행동을 뒤집어놓을 수도 없다. 하지만 지난 일도 자기 나름의 이야기로 새롭게 써내려갈 수는 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그럴 듯한 이야기를 갖고 있느냐는 것에 달렸다. 이직이 잦았던 한 직장인은 자신의 경력을 보고 남들이 자신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여길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토리로 풀어낼 수 있게 되자 자신감을 되찾았다.
퇴직하고 나서 “회사는 나를 치약처럼 끝까지 쥐어짜더니, 다 쓰고 나서 버렸다”라는 이야기로 자신의 직장생활을 풀어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최선을 다했지만 원했던 지위에 오르지 못 했던 직장인이 “내 삶은 실패작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치열한 경쟁에서 끝까지 꿋꿋하게 잘 버텨냈다”고 할 때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성공하려고 악착같이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과 “다음 세대에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갖고 있는 인생의 의미는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인생 서사(life narrative)는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삶을 계속되는 이야기로 인식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을 계속 고쳐 쓰며 살아간다. 역경 이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도 서사에서 나온다. 트라우마를 겪더라도, 그 경험을 의미 있는 스토리로 바꿔낼 수 있으면 충격에서 벗어난다. 살면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를 인생이라는 큰 그림으로 일관되게 묶어내는 것이 이야기의 역할이다. 그렇게 연결된 체험들은 의미라는 공통된 씨줄로 엮인다. 이것이 자기 삶의 주제가 된다. 고통스러운 감정도 이야기를 통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야기와 감정은 서로 교차하며 새로운 이야기와 감정으로 바뀐다. 이야기는 감정에 빛을 주고 색을 입혀준다. 분노는 빨간 장미가 되고, 우울은 회색 낙엽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마음으로 녹아든다.
곤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야기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야기할수록 더 깊은 불행으로 빠져드는데도 끊임없이 그것을 말하고 또 말하면서 부정적 감정을 키운다.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면 인생 서사도 새롭게 각색해야 한다. 정신적 소생에는 참신한 내러티브가 필요한 법이다.
인생 서사는 그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어떤 제목을 붙일까’라고 생각해보자. “내 인생이 한 편의 영화가 된다면, 그것에 어울릴 만한 광고 문장은 무엇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미래를 내다보며 인생 시나리오를 써 봐도 좋겠다. 이야기는 추상적인 인생을 눈앞에 그려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그 삶에 다가가기가 훨씬 쉬워진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자아를 계속 성장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이야기가 있어야 안도하는 것이 인간이다. 무작위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짓는다. 그럴듯한 서사로 풀어낼 수 있어야 고된 인생을 견뎌낼 수 있다.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본능의 발현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역사로 만들 줄 아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고 니체는 말하지 않았던가. 언젠간 사라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계속해서 흘러가는 이야기로 허무를 이겨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어보자. 내 삶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기를 바라는가. 인생 영화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나라는 캐릭터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인간은 사라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계속해서 흘러가는 이야기로 허무 이겨낼 수 있어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일 년 동안 방황하며 시간을 흘려보낸 청년이 진료실을 찾아왔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아픔에 휩싸여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고 한다. 슬픔에 잠겨 한 달 두 달을 흘려보냈는데,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어느새 일 년이 지나버렸다. 그때를 돌아보면 자신은 인생 레이스의 낙오자처럼 느껴진다고 청년은 말했다. 지금은 의욕을 되찾고 취업을 준비 중인데, 만약 면접관이 그 일 년에 대해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했다. 자기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오점을 남겼고, 그것 때문에 직장을 얻는데도 실패하고 말 것이라며 불안해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시간을 되돌려 자신의 행동을 뒤집어놓을 수도 없다. 하지만 지난 일도 자기 나름의 이야기로 새롭게 써내려갈 수는 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그럴 듯한 이야기를 갖고 있느냐는 것에 달렸다. 이직이 잦았던 한 직장인은 자신의 경력을 보고 남들이 자신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여길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토리로 풀어낼 수 있게 되자 자신감을 되찾았다.
퇴직하고 나서 “회사는 나를 치약처럼 끝까지 쥐어짜더니, 다 쓰고 나서 버렸다”라는 이야기로 자신의 직장생활을 풀어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최선을 다했지만 원했던 지위에 오르지 못 했던 직장인이 “내 삶은 실패작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치열한 경쟁에서 끝까지 꿋꿋하게 잘 버텨냈다”고 할 때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성공하려고 악착같이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과 “다음 세대에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갖고 있는 인생의 의미는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인생 서사(life narrative)는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삶을 계속되는 이야기로 인식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을 계속 고쳐 쓰며 살아간다. 역경 이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도 서사에서 나온다. 트라우마를 겪더라도, 그 경험을 의미 있는 스토리로 바꿔낼 수 있으면 충격에서 벗어난다. 살면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를 인생이라는 큰 그림으로 일관되게 묶어내는 것이 이야기의 역할이다. 그렇게 연결된 체험들은 의미라는 공통된 씨줄로 엮인다. 이것이 자기 삶의 주제가 된다. 고통스러운 감정도 이야기를 통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야기와 감정은 서로 교차하며 새로운 이야기와 감정으로 바뀐다. 이야기는 감정에 빛을 주고 색을 입혀준다. 분노는 빨간 장미가 되고, 우울은 회색 낙엽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마음으로 녹아든다.
곤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야기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야기할수록 더 깊은 불행으로 빠져드는데도 끊임없이 그것을 말하고 또 말하면서 부정적 감정을 키운다.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면 인생 서사도 새롭게 각색해야 한다. 정신적 소생에는 참신한 내러티브가 필요한 법이다.
인생 서사는 그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어떤 제목을 붙일까’라고 생각해보자. “내 인생이 한 편의 영화가 된다면, 그것에 어울릴 만한 광고 문장은 무엇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미래를 내다보며 인생 시나리오를 써 봐도 좋겠다. 이야기는 추상적인 인생을 눈앞에 그려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그 삶에 다가가기가 훨씬 쉬워진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자아를 계속 성장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이야기가 있어야 안도하는 것이 인간이다. 무작위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짓는다. 그럴듯한 서사로 풀어낼 수 있어야 고된 인생을 견뎌낼 수 있다.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본능의 발현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역사로 만들 줄 아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고 니체는 말하지 않았던가. 언젠간 사라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계속해서 흘러가는 이야기로 허무를 이겨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어보자. 내 삶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기를 바라는가. 인생 영화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나라는 캐릭터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출처 : 네이버뉴tm(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