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아이가 말했다, "그냥 지옥 같아요"[체헐리즘 뒷이야기]
남형도 기자 입력 2019.05.11. 06:00
성적 집착케 하는 교육 환경, 조바심 내는 부모..아이들 '놀 권리'는 없었다
[편집자주] 지난해 여름부터 '남기자의 체헐리즘(체험+저널리즘)'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뭐든 직접 해봐야 안다며, 공감(共感)으로 서로를 잇겠다며 시작한 기획 기사입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자식 같은 기사들이 나갔습니다. 꾹꾹 담은 맘을 독자들이 알아줄 땐 설레기도 했고, 소외된 이에게 200여통이 넘는 메일이 쏟아질 땐 울었습니다. 여전히 숙제도 많습니다. 그래서 차마 못 다한 이야기들을 풀고자 합니다. 한 주는 '체헐리즘' 기사로, 또 다른 한 주는 '뒷이야기'로 찾아갑니다.
밤 9시쯤, 동네 학원가를 서성거렸다. 학원들이 꽤 몰려 있는 곳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앳된 얼굴이었다, 많아야 11~12살쯤 됐을까. 몇몇은 장난을 치고, 몇몇은 수다를 떨며 학원 버스에 올랐다. 그중 한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몹시 지친 기색이었다. 아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신분을 밝혔다. 멍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많이 고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짧게 물었다.
나: "혹시 몇 살이에요?"
아이: "12살이요."
나: "학원이 이렇게 늦게 끝나요?"
아이: "네, 매일매일 그래요."
나: "다니는 거 힘들죠?"
아이: "네."
나: "얼마나요?"
아이: "그냥 지옥 같아요."
예상보다 센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아이에게 고맙다 하니, 인사를 꾸벅한 뒤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자그마한 체구에 무게를 알 법한 축 쳐진 가방. 이제 고작 12살, '어린이'라 불리고, 한창 뛰어노는 게 좋을 나이였다.
방과 후 아이들 일상을 보고 있었다. 어린이날 전날인 4일, 초등학생 체험 기사가 나간 뒤였다. 서로 다른 학교 두 곳에서 하루를 함께 보냈었다. 쉬는 시간 1분도 놓칠세라 아껴 놀던, 무척 해맑던 녀석들이었다. 그 뒤 모습은 어떨까. 그게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교실에서 물었을 때, "학원가기 싫고, 더 많이 놀고 싶다"던 아이들 호소가, 메아리처럼 계속 울렸다.
현실은 물에 젖은 솜 마냥 묵직했다. 학교서 몇 번이고 들었던 얘기 그대로였다.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는 '특목고'를 준비한단다. 일찌감치 준비반을 시작했단다. 그날 저녁은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웠다고 했다. 국어·영어·수학 등 주요 교과목은 이미 고등학교 수준으로 배운단다. 평일·주말 가릴 것 없이 학원에 간단다. 집에 와서도 학원 숙제를 하다 자정을 넘기기 일쑤란다. 4학년 때까지만 해도 공부가 좋았다던 아이는, "이젠 숨 막힌다"고 토로했다. 그래도 부모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공부에 매달린단다.
그보다 두 살 어린 4학년 남자아이는 수학을 잘 못해, 수학학원만 2개를 다닌다고 했다. 하교 후 집에서 30분 정도 쉬었다가, 바로 학원에 간다고 했다.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아이는 "차라리 학원이 편하다"고 했다. 집에 가면 닦달하는 엄마·아빠 때문에 맘이 편치 않단다. 옆에서 장난치는 친구에게 '헤드락'을 걸던 녀석은, 영락 없이 11살이었다. 학원 가방을 들고 긴 한숨을 쉬는 게 어울리지 않는.
이런 현실을 뒷받침해줄 자료를 찾다, 다소 의아한 연구 결과를 봤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서 조사한 '아동행복생활지수'란 자료였다. 그런데 "아동의 학습 시간이 증가할 때, 행복감이 더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내용이 있었다. 쉽게 말해, 더 많이 공부하는 아이가 더 행복하다는 거였다.
왜 이런 결론이 도출됐는지 더 깊이 살펴봤다. 그 과정은 이랬다. 학습 시간이 많은 아이가, 일반적으로 학업 성적이 좋단다. 그래서 아이의 행복감도 증가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아이에게 기대되는 주요 가치가 '성적'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여겼다. 시험 점수가 안 나와 자존감이 떨어지느니, 학원에 가고 공부를 더해 행복한 게 낫다 여겼을 것이다. 아이에게, '그저 잘 먹고 크고 잘 노는 것'만 바랐다면, 나오기 힘든 결과가 아녔을까.
학교 운동장서 뛰어놀며 깨달은 게 있다. '맘 편히, 맘 놓고 놀았던 시간이 살면서 참 짧았구나'하고. 벌써 중학생 때부터, 노는 게 편치 않았던 것 같다. 축구하자 하면 학원간다 했고, 시험 점수 하나하나에 맘 졸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턴 학원 땡땡이도 자책감에 못 치게 됐다. 성인이 된 뒤엔 노는 게 예전 같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 철없이 노는 걸 까먹게 됐다.
그러니, 다른 건 많이 생각말고, 더 많이 놀게 해주면 어떨까. 그냥 아이들이 웃는 게 보기 좋으니까. 어차피 누구나 다 어른이 되니까. 언젠간 그리 놀고 싶어도 놀 수 없게 되니까. 그럼 해맑게 웃을 수 없게 되니까.
밤 늦게 귀가하는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맘 놓고 실컷 자고 일어나 친구들하고 노는 게 꿈"이라 했다. 이제 12살짜리 아이의, 정말 소박한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