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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잎국/변영희

능엄주 2015. 3. 26. 19:34

포기김치며 달랑무김치 갓김치 등 일련의 김장 작업이 대강 마무리되자 책상 앞에 좌정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 여름이 지나 1년이 흐르는 동안 내 마음은 목적지도 없이 동서사방을 헤매고 다녔다.
가을 하늘에 떠돌고 있는 구름처럼 멀리 달아나고 있는 마음을 잡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해야 조금씩 잊혀 질 거라고 했다. 어느 정도라는 그 때가 언제인가, 그 때는 내 마음이 고요해질까.

갑자기 겨울이 온 것처럼 날씨가 추워지더니 거친 비바람에 아파트 단지의 단풍잎들이 마구  흩날리고 구절초 화단은 처참하게 스러진다. 며칠 후 날씨는 다시 포근해졌다. 호수공원의 개나리가 피어나고, 해마다 세계꽃박람회가 열리는 장소, 장미넝쿨이 아치형으로 어우러진 곳에는 빨간 장미꽃이 피어 계절을 분간하기 어렵게 했다.

기온이 오르고 내리면서 김장 김치가 알맞게 익어갈 무렵 대구에서 사돈네가 오셨다.

저녁 식사하러 오라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잘 익어 유산균 향기를 솔솔 뿜어내는 달랑무김치를 퍼 담았다.

더 무엇을 가지고 갈까 했지만 과일을 비롯해서 각종 먹을거리가 지천 아닌가.

가끔 아들네 집에 가보면 먹을 것 입을 것, 장난감, 학용품이 집안을 온통 잠식하고 있었고 그게 요즘 더욱 심화된 감이 있었다.

손자녀석들이 요구하지 않아도 그들 아빠는 물론, 녀석들의 고모가 옷이며 먹을 것들을 바리바리 사들고 가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아들네로 갔다. 손자 외조모가 달려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는 마늘 냄새가 났다. 베란다에서 시들고 있는 육쪽마늘을 까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 시방 시들고 있는 게 어찌 마늘뿐이랴. 베란다에 둥지를 튼, 1학년 손자가 심어놓은 나팔꽃 잎과 가지를 몽땅 갉아먹고,

양란의 두터운 꽃이며 이파리까지 야금야금 다 쪼아 먹고 살이 통통 쪄 있는 앵무새 한 쌍을 빼고는 우리들의 마음은 시름시름 시들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고, 얼굴이 많이 여뷔셨네요.”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많이 드시소. 꽃게가 하 싱싱해서 시래기 듬뿍 넣고 진잎국을 끓였습니다.”
  꽃게 진잎국은 간도 삼삼한 것이 국물 맛이 시원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진잎국을 자주 끓였다.

김장철이 지난 다음 그 흔해빠진 시래기에 돼지뼈를 넣었는지, 사골 고은 물에 시래기와 선지를 넣고 끓였는지는 모르지만,

 먹으면 속이 든든해지던 어머니의 구수한 진잎국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진잎국을 끓일 수 없을 때는 장이 서는 날 나에게 큰 냄비를 들려주며 진잎국을 사오라고 하셨다.

“언년이는 일이 너무 바쁘니 네가 좀 갔다 와야 되겠다.“ 
 나는 어머니의 명령에 한 마디 거역도 못하고 양은냄비를 들고 시장으로 갔다.

거기 가면 나 말고도 진잎국을 사러오는 친구들을 더러 만날 수가 있었다. 시장에서 큰 가마솥에 장작불로 막 끓여내는

진잎국은 어머니의 진잎국과 재료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국물이 진하고 맛이 일품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멀리서 오신 분을 제가 대접해야 옳은데 이렇게 얻어먹어서 어쩝니까?”
“잘 드시니 제 마음이 좋습니다.”

나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H초등학교 앞을 빠르게 걸어 집으로 왔다.
집으로 들어서자 나는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딩동 딩동!”
“십초 안에 문 열어라 오버!” 
 나는 현관으로 나아가 문을 활짝 열었다.
“마, 이거 드시고 몸 추스르시소!  기양 계시면 큰일 납니데이.” 


문이 열리자 10초 안에 문을 열라고 호통읗 치던 손자녀석들은 날래게 숨어버리고

녀석들의 외조모가 보자기에 싼 것을 나에게 주었다. 보자기를 풀자 구수한 진잎국 냄새가 폴폴 새어나왔다.

거실 벽 한 가운데 걸려있는 하늘나라에 주소를 둔 딸의 사진과, 사위와 손자녀석들 사는 모습 보면

사돈댁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질 터인데 어찌 진잎국이랴!
나는 아들네 집에 간 것을 후회했다.  안 보고 안 만나는 게 차라리 덜 슬플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