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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변영희글

능엄주 2019. 4. 12. 11:40

살다 보면


긴 인생 살다 보면 원하지 않는 곳에 갈 수도 있고, 가고 싶어 목마르게 원하던 장소에 가서도 별다른 느낌이 오지 않희한한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만나서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뜻밖에 첫눈에도 친근감이 드는 이를 대면하기도 한다.

보아도 안 보아도 아무런 해도 없고, 반면에 어떤 감도 오지 않는,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 풍경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여행은 그래서 묘미가 있다고 해야하나? 지루한 일상을 훌쩍  떠나보는 데에 의미를 두어야 하나?

겨우내 시름거리고 앓다가 이것저것 곰곰히 따져 볼 겨를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꽃샘추위에 봉오리 맺힌 봄꽃들이 개화를 망설이고. 이미 만개한 진달래며 개나리는 예년에 비해 더 일찍 꽃잎을 접는 기현상이 올해라고 예외가 아닌, 맵찬 바람결에 비구름마저 오락가락 하는 날 우리는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현지의 날씨에 대해 들은 바 없이 나선 길이어서 나는 공항에 내리자 미끈하게 잘 자란 야자수 행렬을 바라보며, 온화를 지나쳐 푹푹 찌는 남쪽 나라의  습도와 열감에 당황했다. 서늘한 가을이 아니라 완전 여름기온이었다.


가방에 싸 가지고 온  옷들이라고 시원한 셔츠, 불라우스 한 벌 없었다.

내려쬐는 햇볕은 모자로, 양산으로 방어를 한다고 해도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후덥지근한 열기는 여행 준비에 소홀했던  내 분주한 나날을 많이 돌아보게 했다. 항용 대개의 여행이 그렇듯 높은 곳을 오르는 것 아니면 한없이 걸어가야하는 코스 일색이었다.

'힘들면 그늘에 앉아 있으면 되지,'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먼 곳까지 일부러 시간 내 찾아가서 하늘구름과 지나가는 행인들만 바라보기는 허무한 노릇이었다.

집 떠난 개고생?  첫날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무릇 여행이란 개고생이 더 실다운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나름 오기에 찬 다짐을 앞세우고 산길, 비탈 길을 오르고 걸어가기를 한 나절. 땀이 옷을 훔씬 적시고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걷고 나자 전신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지는 변화?가 일어났다. 땀 흠뻑 흘린 것이 심신을 클린하는 긍정적인 결과로 다가온 것이다. 이만 정도의 오르기와 걷기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의 다른 과제 역시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 날도 역시나 오르고 걷기였다. 땀 흘리며 오르고 걷는 일 외에 바라보고 느끼고는 그 다음이었다. 

애초 썩 내키지 않는  여행이었지만 나는 인내했고, 나를 시험하는 기회로 삼았다. 하면 할 수 있구나. 오르지도 않고 미리 주저앉아버리는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았다고 하면 오산일까.  


집으로 돌아가서야 지쳐 쓰러지건 말건 당장은 산과 골짜기를, 높고 험한 돌계단을 오르고 걸어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공부한 분량에 비해 시험 성적이 좋은 때처럼 나는 모처럼 흐뭇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운 건, 긴 여행이든 단기 여행이든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관건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여행이고 그리고 그 여행의 동반자가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심신 공히 몹시 고생스러웠지만 나는 잘 견뎌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다음 번엔 좀더 준비를 완벽하게, 건강도 더 살펴보고 여행을 계획할 일이다. 불건강을 무릎쓴 무모하고 만용을 부린 것 같아 반성의 여지가 다분했기때문이다.

식물도감을 펼치고 도시 전체를 아름답게 장식해주던 큰 나무에 핀 다홍색, 노란 색, 보라빛깔의 꽃 이름을 찾아보기로 하자.

버스 기사도, 가이드도 모른다는 그 꽃들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