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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나절/변영희

능엄주 2019. 2. 15. 22:14

잠에서 깨어나니 창밖은 아름다운 설경이었다.

많이 내린 눈은 아니지만 칙칙한 아파트의 겨울을 장식하는데는 일품이었다.

평화로웠다. 푸근했다. 곧장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눈은 시나브로 내리면서 녹고 있었다.


점심 때가 되자 눈이 녹아내려 나무는 기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땅바닥은 물반 눈반으로 질퍽하다. 미끄러울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호수공원 나들이를 다른 날로 미루었다.

그리고 정진 몰두 지경으로 스스로를  함몰시켰다.


이따금 고개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아깝네. 눈 경치가 짧게 끝이 나는군. 오랜만에 내린 눈인데!

책상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탄식했다.

습도 때문인지 창밖 풍경이 을씨년 스러워 평소보다 더 일찍 커튼을 내려 시야를 가려버렸다.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감기 안 걸리고 잘 있나?

 미끄러운데 외출 조심해.

 작품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가.

 가까이 살면 오늘 같은 날 만나고 싶은 친구야!

 글 쓰다 힘 딸리면 전화해. 갈비 사줄 게.

 겨울도 끝자락인 듯 하동에는 매화꽃이 피었단다,'


별 내용이 아닌데 나는 울컥! 설움이 북바치는 걸 느꼈다.

친구는 늘 나를 눈물짓게 만든다.

글쓰는 작업이 힘겨워서일까. 보상  없는 중노동에 자괴감이 들어서일까.

아침도 점심도 비어때린 빈 위장이 중증 센티멘탈에 걸려들었나.

빈집에 홀로 앉아 소설 바다에 홈싹 빠져들어서인가.


친구의 마음결에  내 차거운 심상이 눈녹듯 녹아내렸기 때문이리라.

혈육이라해도 다 그렇게 비단결일 수는 없다. 영혼이 해맑은 , 마음밭이 비옥한,

감히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짧은 글 몇줄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친구.

친구는 마음을 채색하는 화가이며  신묘한 연금술사인가.

 

저녁나절 나는 오늘 작업을 마무리하며 친구에게 답글을 보낸다.

봄꽃이 피어나면 제일 먼저 만나자고.

북촌마을을 걸으며  과거 서울과 현재 서울을 더듬으며 우리의 소녀시절을 이야기하자고.

그리운 날, 재회를 위하여 건강 잘 유지하자고.

2019.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