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山寺)에서
“솨― 솨―.”
나는 잠결이었으므로 그것이 무슨 바닷가 파도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근처에 강이나 폭포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싶어서 날이 새면 찾아 나서리라 그렇게 마음먹었다.
물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소리 같기도 했지만 두 가지 다 그 소리의 성질에 있어서는 거의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다.
어쩌면 또 빗소리 같기도 하였다.
어제 버스를 타고 올 때 그 다섯 여섯 시간을 내내 흐려 있던 하늘에서 맹렬하게 비를 쏟아 붓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러나 밖으로는 나가 보지 않은 채 정체 모를 그 소리 “솨솨” 하는 힘차고도 엄숙한 소리에 귀를 모으고 캐시밀론 이불자락을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방바닥은 적당히 따뜻해 있었지만 낯선 고장에 왔다는 설렘과 외로움이 작용해서였을까. 내 마음은 춥고 떨리는 상태였다.
여름용 캐시밀론이불은 내 어깨까지 따듯함을 유지시켜주지 않았다.
몇 시나 된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짙은 어둠의 그늘에서 속히 해방되기 위해 불을 켜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 어둠 가운데 움츠리고 있자니까 희부옇게 창문이 밝아왔다. 초나흘 달빛이 스러지고 여명의 흐릿한 빛이 소리 없이 나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서서히 새벽이 열려오는 동안에도 “솨-솨” 하는 강렬한 소리는 여전했다.
세상 때에 절고 미움과 회한으로 얼룩진 나의 영혼을 씻어 내리듯 그 소리는 혹은 멀고 혹은 가깝게 끊임없이 내 귓가를 스쳐갔다.
“딩딩! 딩딩!”
그때 어디선가 나지막하면서 위엄 있게 징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지러운 상념에서 깨어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 밖으로 나오니 그 소리 “솨-솨-” 는 더 크고 확실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숲속의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었다. 산사의 뒷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였다. 그것은 곧 산의 소리, 자연의 소리였으며 또한 살아 있는 것들이 한데
어울려내는 생명의 소리이기도 하였다. 산의 고요함 속에서 그들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과시하고 있는 듯했다. 인간의 때 묻은 심성을 세척하고 치료해 주는 역할을 그 소리로서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뜰로 내려서니 태고를 거슬러온 듯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작은 웅덩이에 맑은 물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나는 큰 바가지에 가득 찬물을 떠서 쭉 들이켰다. 산을, 자연 자체를 마시고 있는 기분이었다.
원시의 순수한 맛 그대로였다. 차가운 기운이 위장에서부터 전신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목탁소리가 울리고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낮은 돌담 주위에 장명등이 외로운 파수꾼처럼 서 있었다.
잔디밭을 사뿐히 밟고 나는 나도 모르게 법당 안으로 빨리듯 들어갔다.
비구니 스님 몇 분과 고시와 대학입시 공부를 하기 위해 절에 머물고 있는 학생들 몇 몇이 낮은 음성으로 불경을 외며 부처님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불상 앞에 공손히 합장을 하고 서자 이상스럽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음 순간 시야를 부옇게 흐리면서 더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팔 배를 하는 나의 무릎이 떨리고, 엎드러질 듯 몹시 힘에 겨웠다.
삶의 여정에서 얻은 여러 종류의 한과 슬픔들이 백팔 배를 하는 나의 한 동작 한 동작으로 용해되는 것만 같았다.
천방지축 시행착오만 일삼아온데 대한 무한한 자책과 회오의 시간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새벽 예불은 사전에 아무런 준비 없이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공교롭게도 새벽 예불시간에 맞춰 잠을 깬 사실에 대견해 하며 절 안 구석구석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시간은 아직 4시였다. “솨―솨―”하는 소리는 법당 밖에서 계속 울려오고 있었다.
인간의 나태한 잠을 깨우듯, 그칠 줄 모르는 탐욕과 번뇌 망상을 무마하듯, 결국은 이승의 모든 것이 공(空)이며, 허(虛)인 것을 깨닫게 하듯,
“솨―솨―”하는 소리가 이제는 한결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되어 내 가슴 복판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나는 환자들이 정양하러 와서 묵고 있는 방들을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밤새 불 밝혀놓고 공부하고 있는 고시생들 방 앞을 지날 때는 숨소리마저 죽이면서 살금살금 산신각으로 올라갔다. 산신각엔 어디서건 단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혼백들의 무리로 가득할 것만 같다. 섬뜩함과 공포심이 일어났지만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산신각 그 앞에 우뚝 서서 나의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생명을 부여받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감사했다.
감사로 운을 땐 기도는 진솔하고 값진 것. 군더더기가 필요 없다.
내 영 깊숙이 남아 있는 욕심, 헛된 꿈은 그것의 실체를 투시하고 미련 없이 던져버릴 수 있었다. 오로지 나는 나로서 가장 나 다웁게 내 몫을 다할 수 있기를 간구했다.
그런 나의 곁에서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이 “솨―솨―”하는 소리는 산의 정기와 이른 봄의 신선한 새벽빛을 가르며 절실하고 강렬한 함성으로 밀려왔다.
나는 깊은 정적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산과 그 주변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어쩐지 몸도 마음도 가뿐해진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 심신은 홀가분해졌고 머릿속은 말끔하게 씻어진 느낌이었다.
“솨―솨―”
산의 나무들과, 그 나무들 사이를 수시로 넘나드는 바람과 물과 그 속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합쳐서 내는 소리는 산을 가득 메우고 멀고
아득한 사바세계로 밀려가고 있었다.
출처 ; 변영희수필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