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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부엌을 지켜라/호원숙·수필가

능엄주 2018. 12. 21. 19:54

[일사일언] 부엌을 지켜라


호원숙·수필가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은 살림이었다. 그중에서도 부엌일은 미리 해 놓을 수도 없고 한꺼번에 몰아서 할 수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없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느는 것도 아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것도 지루하고, 표도 잘 나지 않는다.

나는 평생 살림을 해온 사람이지만 후하게 점수를 준다 해도 중간이 안 될 것이다. 이 나이에도 서툰 것투성이라 어쩔 줄 모를 때가 많다. 그런데 요사이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틀면 살아 있는 느낌이 들면서 감사의 마음이 솟는다. 따뜻한 물로 설거지할 때나 파를 다듬어 잘 드는 칼로 착착 썰 때,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 자루에 든 완두콩이나 강낭콩 껍질을 까면서 망연히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먼 곳에서부터 오는 행복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조용하고 오롯한 시간이라 누가 부엌에 들어오는 것이 반갑지 않을 정도다.






가끔 넋을 놓고 TV에 나오는 음식 프로를 볼 때가 있다. 채널 어디를 돌려도 음식이 화면을 채울 때도 많다. 남자들이 만들고 남자들이 먹고 남자들이 감탄하는 프로그램을 멍하게 보고 있으면 요란하고 자지러지는 듯한 언어에 질리고 온갖 기교에 혼이 빠져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져든다. 남자들이 여자들 영역이었던 부엌에까지 쳐들어와 지배하려 한다는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구식이라 그런가, 부엌의 주도권은 한 사람이 쥐어야 맘 편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분명한 건 부엌을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누가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주고 내 몸을 지켜 주리오.

말없이 음식을 다듬고 경건하게 불과 물을 조절하시던 할머니의 손이 생각난다. 오직 식구들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던 할머니의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호원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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