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하늘을 본다.노을이 휘황하다. 발갛게 이글거리는 것도 잠시 하늘은 회청색 줄무늬를 확산시키면서 점차 어둠 속에 파묻힌다. 아름다우며 장엄하고, 찬란하고 눈부심도 찰나에 불과하다. 초저녁 산들바람 속에 스러져 간 태양빛이 아쉬워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하염없이 서 있는 나의 실체는 무엇인가? 왜 서 있는가?
헤어아트의 큰 거울 앞에 앉아 깜짝 놀랐다. 웃음끼가 동난 울울침침한 이 여인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을 하다가 연희동의 이층 건물 미용실에 이르렀던가. "너가 누구니?" 라고 거울을 응시하며 묻고 싶어진다. 낯이 설어서다. 퀭한 눈빛과 그을린 얼굴 피부, 눈밑에 파인 깊은 주름살. 꺼실한 머리칼이며 좀체로 입을 열것 같지 않은 꽉 다문 입술, 종횡으로 갈라지고 뻗어내린 세월의 흔적들, 잘 아는 사람의 이름을, 늘 거는 전화번호를 까맣게 잊듯이 거울에 비친 생소한 얼굴과 대면하고 있는 나는 누구이며 그 무엇인가.
땀 뻘뻘 흘리며 지하철 역으로 달려가다가 어떤 목소리에 귀기우린다. '그렇게 들볶지 마라. 급하다고 뛰어가지 마라. 그냥 편하게 두고 보아. 좀 늦다고 큰 일 벌어질 것도 아니잖아. 무엇이건 자연스러운 게 최상이란다' 라고 준엄하게 꾸짖는 또 다른 나와 만난다. 자기자신을 소홀하게 대접하거나 내면에서 올라오는 진실한 소리에 둔감하지 말자고 또 하나의 나가 깨우쳐준다. 내 안에는 일의 시작이나 진행에 과격함을 막아주고 설사 과오나 실수가 발생해도 너그러히 수용하는 보다 성숙한 다른 나가 실재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영겁의 시간. 그 강물살에 떠밀려 오늘 여기에 이르러 있는 나. 이 우주 안에 天. 地. 人 이 존재하듯 나에게도 영혼이 있고 정신과 육체가 있다. 지난 날 큰 스님에게 배운 바로는 자기 안에 本我. 眞我. 假我가 있다고 했던가. 지글지글 뜨겁게 끓는 용광로같은 육신의 욕망은 대개는 일년생 식물처럼 그 형태나 지속성에 있어서 사람마다 차별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특별히 정신면에서 우수한 소질을 보이는 사람, 또는 보통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영혼의 세계에 밝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나는 어떤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일까. 영혼 부분인가, 정신일까, 육체일까. 그건 판별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정신노동에 몰두하는 부류, 글쓰는 것이 생활화한 사람들의 동네에 진즉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에 그 답이 쉬이 찾아질 가능성이 보인다.
나는 예를 들어 운동선수나 육체노동자로서 살아온 경험이 전무하므로, 더구나 내 집 사방 모서리에 날이 갈수록 쌓여가는 각종 서적들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기보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고쳐서 묻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다. 나는 결국 글쟁이니까. 백지와 고요 속에 침몰하여 많은 밤을 지새운 기억이 뇌리에 선명하다. 소중한 작품 한 편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창조와 창작의 터널에 갇혀 내 푸르른 젊음을 깡끄리 바쳐오지 않았는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돈벌이 수단으로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다. 學而時習의 전래였을까. 이미 전생에서 익혔던대로 그 길 따라 흘러온 내가 아니었을까.
'나는 나' 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변함없이 나는 나 일 것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어 보인다. 나는 나이므로 해서다. 나에서 시작하여 나로 종결짓는 나. 나를 발전시키고 나를 진화시키는 나. 내 안에서 모든 것을 꽃피우고 열매맺는 나. 언제나 나는 '너의 나' 가 아닌 '나의 나' 인 것이다. 단순히 내 부모님의 자식,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생물학적인 나가 아니라 무한대의 우주로부터 파생된 나, 지구별에 산보나온 외로운 홀겹 씨앗이 바로 나일 수 밖에 없다. 존귀하며 희소하고 각별한 소명이 부여된 생명.
'天上天下唯我獨存' 처럼 당당한 자기 선언의 의미를 되색여본다. 이렇듯 내가 나이므로 이 사바세계에 살아남을 명분과 가치가 주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억겁의 생을 통해서 형성된 나를 찾아 나는 지구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마을로 연필 한 자루 달랑 들고 본래의 나, 참 나를 찾아서 먼 여행을 떠나온 게 아니었을까 '나는 나' 이므로 '나가 나' 이므로 글쟁이로서의 삶을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랴.
나는 누구인가. 저녁노을에 정신이 홀려 얼어붙은 듯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나는 이제 막 서녁 하늘로 사라진 태양의 그림자인가. 파편인가. 粒子인가. 어둠 속에 매몰된 푸른 하늘 한 조각인가. 홀연히 다가온 서늘한 갈바람인가. 그 바람의 숨결인가. 그렇게 이것저것 무엇이건 다 설명되거나 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나인 채로 여기 우뚝 서 있다. 어제도 있어 왔고, 내일도 또 영구한 먼 장래에도 그렇게 나는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므로 해서 나는 자유하고 신성한 모습으로 지금 머물고 있다. 나의 고유성, 나는 나 일 수 밖에 없는 哲理로서 영원과 맞닿아 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더는 끄달리지 않기다. 내가 나였고, 내가 나이어야 하는 까닭에서다. 장강의 모래알처럼 헤아리기 힘든 무량한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구불변하는 나의 실존. '나는 나' 이다
2008년 <한국여성문학인회> 문집 기고 |